안동으로 산 넘고 물 건너 달려온 신작로 이야기
안동으로 산 넘고 물 건너 달려온 신작로 이야기
  • 유경상(경북기록문화연구원 이사장)
  • 승인 2022.12.3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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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안동~영덕)와 남북(안동~대구) 신작로는 언제 닦았을까?

[기획연재] 사진으로 읽는 안동 근현대 風景 ② - 신작로

도시를 건설할 때 사방으로 길을 닦아야 하는 건 기본 상식이다. 도시 외부로 통하는 가로망은 사방(四方)으로 닦아야 한다. 우리는 일상대화 중 ‘사방으로’ ‘사통팔달’ 이란 말을 자주한다. 이렇듯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가로망은 대개 사방, 즉 동서남북의 방향으로 건설된다.

1910년까지 안동읍성에서 외부로 통하는 가로망은 죽령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인 남북축과 동해안에서 함창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동서축이었다.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고을이었지만 나름 교통 요충지역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영가지 권5 도로(道路)조에서도 동로(東路-청송, 진보, 영양방향), 서로(西路-예천방향), 남로(南路-의성방향), 북로(北路-옹천, 영주, 예안방향)가 기록돼 있다.

안동은 4대문이 우뚝 서있는 읍성 고을이었다. 읍에서 한양을 가려면 서문을 지나 안교역, 예천, 함창을 거치는 영남대로를 이용하거나 안기역과 연미원, 옹천역을 지나 영주, 봉화를 거쳐 죽령을 넘어갔다. 이를 서문가로망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문가로망은 북쪽과 동쪽으로 이용되는데 예안, 영양, 청송으로 이어진다. 동문을 지나 선어대, 내앞, 가랫재를 넘으면 청송, 영양으로 가는 길이다.

1910년 안동지역 인구는 10만 안팎이었고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된 1910년부터 전국 도시에서 읍성 철거가 시작되었다. 그해부터 안동에서도 4대 읍성 철거가 시작됐지만 단기간에 끝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읍성 철거의 시작과 종료는 알 수가 없다.

김기철 논문(안동도시 공간구성의 변천에 관한 연구, 대구대 박사논문, 2013년)에 따르면 ‘읍성 북측과 서측은 거의 철거가 이루어졌으나 남측과 동측은 아직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지적원도에 성벽 자리인 대지의 용도를 ‘城’으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고증하고 있다. 지적원도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한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이 지적원도를 통해 안동읍의 가로망과 도로 등을 엿볼 수 있다.

원도심 옛길과 신작로에서의 場市(5일장) 풍경

이쯤에서 두 장의 사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1은 안동 원도심 어느 도로에서 장작나무를 지고 있는 장꾼들의 모습이다. 사진2는 안동읍내 신작로와 상점가에 모여 있는 장꾼들이다. 두 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돼 있는데 연대불명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 가며 옛길과 신작로의 전후 사정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1> 안동읍내 원도심 어느 도로에 장작나무를 팔러 나온 흰옷 입은 초군들이 붐비고 있다. 이곳은 어느 시기, 어디쯤일까? 전봇대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2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진1을 먼저 감상해 보자. 이 거리의 장소가 궁금해진다. 오일 장날 안동읍내 원도심 어디쯤일까. 뒤쪽 산등성이는 영남산 줄기일 것이고 산골짜기에 몇 채의 집이 붙어있고 길 양쪽으로 전봇대가 세워져 있다. 길 끝에는 2층 규모 서양식 저택과 솟을대문이 보인다. 우측 함석지붕 주택의 마당방향으로는 연탄난로 연통이 설치돼 있다.

장작나무를 잔뜩 짊어지고 팔러 나온 초군들이 붐비고 있는 이 거리는 어디인가? 촬영을 한다는 고함소리에 사진기를 향해 잠시 서서 포즈를 잡은 삼십여 명의 장꾼들 표정이 흥미로워진다. 장꾼은 대다수가 흰옷(白衣)을 입었다. 장꾼의 복식과 가옥의 형태, 전기공급 등을 통해 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봇대가 세워져야 전기가 들어온다. 안동지역에 전기가 들어온 건 1907년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우편국에서 우편과 함께 전신업무를 시작한 시점으로 본다. 하지만 전신업무는 전기를 이용한 통신이고 관공서와 주택에서 전깃불을 켜는 건 별개로 봐야한다.

동아일보(1925. 12.31.) 뉴스는 '安東에 電燈架設(안동에 전등가설), 去年末日부터 點燈(거년말일부터 점등)'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내용은 “경북 안동읍은 삼남지방의 유수한 고장인 소읍회로 있지만 아직까지 전등이 없어서 주민들은 항상 불만을 느끼는바 거년 봄부터 당지실업가 16인의 발기로 안동전기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이래 많은 노력을 하여 오던바 가설공사가 완성되었으므로, 12월31일부터 점등되었다는데 당국자의 말을 듣건데 점등신청수가 예상이외로 다수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1925.12.26) 뉴스는 “올해 봄에 안동전기주식회사가 창립한 후 사업이 착실히 실행되어 가설이 완성하였으므로 12월25일부터 점등하게 되었고 점등수도 예상이상으로 성적이 좋아 각각이 상점에서 상품진영을 일신하여 새로 켜는 전등 빛을 더욱 빛나게 한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이 촬영된 시점을 1925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사진2> 어느 시기, 안동읍내 원도심의 넓은 신작로에 운집한 수백 명 장꾼들 모습이다. 안동읍내에 신작로가 생긴 이후 5일장에 모여든 조선 백성들의 풍속사진에서 근대생활상을 조금 짐작할 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진2를 살펴보자. 넓은 신작로에 수백 명이 넘는 장꾼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이곳이 원도심의 어느 특정 신작로라는 건 확실하다. 건물 하나가 확연히 돋보이는데 전체 외관이 사각형 평면에 우진각 지붕을 올린 서양식 고전건축 모습은 현재 삼산동에 위치한 ‘신한은행’ 이거나 삼산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안동우편국’ 건물로 추정된다. 안동우편국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1968년 삼산동 조흥은행이 있는 거리의 학생단체 행진모습 뒤편으로 보이는 건물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우측에 있든 상점에는 ‘****공장’ 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좌측길 간판은 제법 큰 ‘**상점’으로 씌어져 있다. 1924년 6월 즈음 신문기사에서 ‘안동시장 대구은행 안동지점 앞’이라는 문구를 참고하면 이 거리가 당시에는 시장통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진3> 1968년 안동농림고 학생들이 체육행사를 위해 시가행진 중이다. 당시 삼산동 조흥은행 앞 거리풍경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현재 삼산우체국 자리에 또 하나의 우진각 지붕 건물이 보인다. ⓒ소장자 권영범,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제공

근대초기 거리 풍속사진을 한순간에 해석하는 건 쉽지 않다. 우회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서문당, 1986)은 유명한 근대사진 묶음집이다. 이 도록에 수록된 ‘김천 욱정통 장날 풍경’, ‘포항 욱정 시장통 장날풍경’ 등에서 안동의 장날 풍경과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영가지에 따르면 조선시대 안동의 장시(場市)는 객사 앞에서 열렸다. 안동읍성 성안의 객사 앞에 2일과 7일에 장이 열렸고, 서문 근처까지 상업활동이 왕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대 즈음에 과거 객사와 관아가 있던 공간에는 군청, 법원 등 근대 관공서 건물이 세워졌다. 장날에 빼곡히 운집한 옛사진을 통해 본정통 거리(현재 기업은행~신한은행~삼산우체국)에서 오일장이 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동 원도심을 관통하는 넓은 신작로에서 열린 오일장의 풍경을 감상하며 특정 시기를 확정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경북안동역 준공(1930년)과 경북선 개통(1931년), 이어진 신시장 설치(1933년) 이전에 펼쳐진 생활풍속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진자료이다.

안동~대구, 안동~영덕 신작로는 언제 닦았을까

신작로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개설한 길이다. 차가 원활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규칙과 규격에 따라 건설된 지역 간 교통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동읍내를 향해 개설되는 넓은 신작로는 언제 어떻게 추진이 되었을까? 기본 질문을 해보는 것 쉽지만 자료부족으로 언제, 어떻게 건설이 됐고 준공됐는지 단정하는 게 어렵다.

먼저 눈에 익숙한 두 장의 사진이 있다. 안동 남후면 암산터널 신작로와 안동읍내 대구은행안동지점 앞 승합자동차 장면이다.

<사진4> 안동시 남후면 암산굴 앞 신작로와 승합자동차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사진5> 안동읍내 대구은행안동지점 앞 승합자동차와 승객들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미천 옆을 지나가는 신작로를 개설하며 뚫은 암산굴 앞에 일직과 의성방향으로 한 대의 승합자동차가 멈춰 서 있다. 이 신작로는 구안국도(대구~의성~안동)의 초창기 모습이다. 그렇다면 구안국도는 언제 개설되었을까? 또한 안동 근대 원도심의 상징 건축물인 신한은행(예전 조흥은행. 일제강점기 대구은행안동지점) 앞에 서있는 승합자동차 양옆으로 흰색 두루마기 옷을 입은 시민들이 모여 있다. 이 두 장의 사진에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 자동차가 사람을 태우고 신작로를 따라 운행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신작로에 차량은 드물게 지나갔을 것이다. 마차와 소달구지, 자전차나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우선, 안동지역 도로 개설 관련 기록 자료를 여기저기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에서 신작로 건설은 러일전쟁(1904년)과 통감부 설치(1906년) 사이에 본격화된다. 신작로 건설은 경제적 거점지역과 간설철도, 항만을 연결하려는 것이 우선 목적이었다. 한일합방 이전에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제인프라를 장악하는 수단으로 도로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1904년 4개 조사팀 중에서 히타 고이치가 김천에서 낙동강 유역을 따라가며 상주선(김천~개령~유곡~통영)과 안동선(상주~함창~용궁~예천~안동~의성~의흥~신주막~부산대로) 등의 지선을 조사했다. 곡창지대인 상주와 동북부의 경제중심지인 안동을 경부선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기에서 상주선과 안동선은 일본식 표현으로 국도가 아닌 군도(郡道)로 이해하면 된다. 이들은 1905년 12월 한국토목사업의견서를 일본 내무성과 조선정부에 제출했다. 1906년 4월 치도국(이후 토목국)을 설치했고 평양 ․ 대구 ․ 목포 ․ 군산에 치도공사소를 세워서 도로건설에 착수했다.

한일합방 이후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도로정책은 도로규칙(제정 1911년, 개정 1915년)에 따르게 된다. 여기에 재조일본인 거류민과 상공인단체, 일본 육군성의 불만과 요구가 크게 합세하며 큰 영향을 끼친다. 이들은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에 도로를 건설해 줄 것을 여러 방식으로 청원했다. 도로는 각 등급에 따라 1등~3등 도로와 등외도로로 나뉘어 규정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928년 작성한 조선토목사업지에 따르면 대구경북권에서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대구~경주 구간 2등급 도로가 노폭 5.9m, 71km 연장으로 건설되었다. 경주~포항 구간은 2등급으로 노폭 3.9m, 30km 연장이었다. 또한 대구시가는 노폭 5.4m로 2.6km가 개수되었다. 이 시기에 안동지역 방면으로 개설된 도로는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단지 1910년 2월 당시에 대구 일본인 상업회의소가 대구와 안동 간 도로건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안동군과 공동으로 도로조사를 시작했다는 기사가 있다.(황성신문, 1910. 2.22) 이는 지방에 거주하던 경제단체가 경북북부권의 곡물 등을 유통하며 이익을 얻어 내기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도로건설은 크게 제1기 치도사업(1911.4~1917.10)과 제2기 치도사업(1917.11~1922 계획, 1938년 완성)으로 나누어진다. 제1기 치도사업기간에 대구~상주 구간인 1등급 도로가 70.69km로 개통됐고, 2등급 도로인 진주~상주선이 172km로 건설되었다.

1917년 (대정6년) 제작된 안동지도에서 좌측 부호(符號) 지면에 ‘2등도로’ 문구가 인쇄된 것에서 당시 대구 방향과 예천 방향으로의 도로가 계획되어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도로 개설이 이루어졌는지는 단정하기 힘들다. 조선총독부의 제1기 치도사업이 종료되는 1917년 10월까지 안동~영덕 구간이 개설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1937년 작성한 조선토목사업지에 따르면 제2기 치도계획기(1917~1922)의 공사노선에 안동~영덕 구간이 나타난다. 충주~영덕선 노선(기종점)에서 안동~영덕 구간 2등급도로가 74.6km로 계획되어 있다. 그렇다면 1917년에서 1922년 사이에 안동~영덕 구간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1928년 2월22일 영덕에서는 주식회사영덕운송점이 영업을 개시해 이미 개통된 충영도로(忠盈道路:충주~영덕)를 통해 영양, 청송, 안동으로 해산물과 지곡물을 수출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안동에서 영덕 방면으로 국비를 투입해 신작로가 가장 먼저 개설된 것은 강구항을 연결해 어류 등 경제적 유통과 이익창출이 굉장히 중요했었다는 걸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제2기 치도계획은 3.1운동의 영향으로 큰 차질을 빚었고 토지보상비와 부역폐지로 조선총독부가 부담해야 할 도로건설예산이 급등해 계획 중이던 노선 중 많은 구간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부역은 농한기를 이용해 8일을 초과하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는 도로개설 현장에 많은 조선인을 강제부역으로 동원했다. 이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비참하고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또한 토지를 강제 수용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반발과 저항은 1919년 3.1운동을 통해 폭발했고,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용지기부와 부역은 폐지되었다. 이런 전후 상황은 제2기 치도사업기에 안동~영덕 구간이 모두 완공되기 어려울 수 있었다는 의문제기가 가능해진다. 향후 더 정확한 자료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제국의회는 1927년 조선철도 12년계획을 승인해 식민지 조선의 교통망을 철도 중심으로 건설하는 방침을 확정했다. 1931년 예천을 지나 종착역인 경북안동역으로 진입하는 경북선 철도를 떠올리면 도로와 철도의 보완관계를 상상해 낼 수 있다.

1920년대 신문에 비친 안동의 도로, 자동차 관련 신풍속도

1920년 이후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안동과 인근 지역에서 도로개설(治道)과 관련된 제목과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치도중(治道中)에 촌부일명참사(村夫一名慘死)’(1923.12.30)는 “서부동에 사는 16세 김씨가 동후면 가는 등외도로를 닦으러 가서 부역하던 중 산이 무너져 참혹히 죽었고 세 사람은 중상을 입어 치료 중이다.”

또한 교통사고에 관한 기사도 있다. “경북도청 참여관 윤씨가 안동, 봉화로 출장갔다가 자동차가 전복해 안동자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됐다.(1922.12.8)” ‘자동차(自動車)에 취객충돌중상(醉客衝突重傷’(1925.6.6)은 “율세동에 사는 서씨가 2일 남후면 수상동 큰길에서 안동을 떠나 대구로 향하는 경북자동차 12호차를 만나 피한다는 것이 차편으로 달려들어 3주간 치료할 상처를 당했다.” ‘자동차부상(自動車負傷)으로 육천원청구소(六千圓請求訴) 담임판사가 실제조사’(1925.7.7)는 “동부동 권씨가 지난 3월에 자전차를 타다가 재등자동차부(齋藤自動車部) 89호와 충돌해 중상을 당했고 손해배상 6천원을 청구했는데 대구지방법원 상야판사(上野判事)가 출장을 와서 발생장소를 답사하고 증인까지 조사했다.”

차를 몰던 운전수의 횡포에 항의하는 기사(1925.11.30)는 “경북자동차 31호 자동차를 몰던 운전수가 풍북면 오차동 거주 오육학술강습회에 재학 중인 14세 강씨의 학생모자와 책보를 탈취해 학교당국이 분개해 대책을 강구중이다”는 것인데 새로 발생한 사회폐단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지역발 뉴스에서는 수해 등으로 인해 도로와 차량운행에 큰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 보도되고 있다. 1925년 7월9일자에는 “7월6일부터 경북 각지에 비가 많이 내려 도처의 도로가 붕궤되어 자동차와 사람의 교통이 끊겼는데, 의성청송간, 청송영양간, 의성안동간, 안동봉화간, 봉화춘양간이 그 대부분이며, 의성과 안동간은 전화까지 불통이다”고 전하고 있다. 같은 해 7월16일자에서는 “지난 10~11일 이틀간 폭주하는 호우로 영호루가 물에 잠겼으나 큰 피해는 없다하며 도로가 파괴되어 대구 예천 봉화 등지로 자동차가 전부 불통되어 모두 우편물이 정체되고 농작물 피해가 심했다”고 했다. 이러한 기사를 보면 1920년대 중반에 안동과 인근지역에 등외도로가 개설돼 자동차 영업이 활발하게 진행됐다는 걸 알 수 있다.

한편으로 도로개설 관련 문제는 지역민의 큰 숙원사업으로 논의되고 있다. 영덕군의 기성동맹회조직(期成同盟會組織) 뉴스(1922.12.8)에서는 “강구항이 영덕군내에서 제일 중요한 요충항인 만큼 육로는 안동~영덕간 이등도로를 근(近)히 완성하고…” 등을 통해 이 도로가 하루빨리 완공되어야 한다는 지역민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또한 예천군과 관련한 뉴스(1924.1.7)에서는 “함창~안동간 이등도로와 예천~영주간 삼등도로의 중심지점에 있으므로 교통기관이 편리하여……조선사설철도가 개통된다면 상공업중심지가 된다”고 보도했다. 이미 도로가 개통돼 있다는 자부심에 철도(경북선) 개통을 크게 기다리며 예천발전의 장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풍기 출신 향토사 연구자인 송지향은 1983년『안동향토지』를 발간했는데 ‘1920년대 왜정시대 안동의 교통편’에서 자동차와 관련해 재미있는 스토리를 서술해 놓았다. 안동에서 자동차가 처음 다닌 시기가 1922년이며 충청도 부자 김갑순씨가 여객회사 7인승 자동차로 안동~대구 구간을 하루 한 번씩 운행했다는 것이다. 오전 8시에 출발하면 오후4시에 대구에 도착했고, 운임은 8원80전으로 쌀 두 가마 값이었다. 또한 일본인 재등(齋藤)이 경쟁에 뛰어들어 운임이 6원으로, 다시 5원, 4원으로 낮아졌다. 두 마리가 끄는 마차가 등장해 주문을 받으면 안동~대구, 안동~의성, 안동~예천 등 사방으로 왕복을 했다. 그때 자동차정류소는 지금의 신한은행 동편 어디쯤 이었다는 것이다.

송지향이 기록한 일본인 자동차사업가 재등(齋藤)은 1925년 8월6일(조선일보) 뉴스에 재등자동차정류소, 재등자동차부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7월31일 오전11시에 안동읍 재등자동차정류소에서 구슬피우는 부인들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농부의 부인인데 직업이 없고 구차한 살림살이로 살아갈 도리가 없어 마침 조선방직회사부산공장에 직공을 모집한다고 해 어린자식과 늙은 부모와 이별하고 한 달에 15원 임금에 팔려가게 되었다. 23명이 부인노동자가 함께 떠나게 되어 가족들이 송별하러 왔다가 가는 사람은 자동차에서 통곡하고, 보내는 사람은 멀리 가는 차를 보며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동생아 하고 울었다. 구경하는 사람조차 동정의 눈물을 금지 못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5년에 대구~안동 신작로에 영업용 승합자동차 등장

또 다른 두 장의 사진은 흥미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안동 혹은 경북북부권에 개설된 신작로 자료가 희박하다보니 근대시기 도시의 규모가 매우 컸던 대구지역의 사진으로 근대시기 안동방면으로의 신작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6> 1917년 개통한 대구 중앙로 엽서사진. 좌측 편에 安東行 운행간판이 보인다. ⓒ옛사진으로 본 근대대구
<사진7> 1924년 대구 중앙로가 완전 개통되고 전후의 엽서사진. 좌측 편에 가로와 세로 형태의 ‘安東方面行’과 ‘慶州方面行’ 시외버스 운행간판이 선명하다. 간판 앞에는 승합자동차가 일렬로 서 있다. ⓒ옛사진으로 본 근대대구

2008년 발간된『옛 사진으로 본 근대대구』에 ‘대구 중앙로’ 엽서사진 2장이다. 사진6에 보이는 중앙로는 1917년 개통한 12간(間) 대로이며 1925년(大正14년) 기념스탬프가 찍혀있는 엽서이다. 이 신작로는 아직 비포장이고 차량바퀴 자욱이 선명하다. 신작로를 걷는 행인 다수는 두루마기 차림새이다. 그런데 이 엽서사진 좌측 편에 시외버스 운행간판이 보이고, 세로글씨로 ‘安東行’이 보인다.

사진7의 중앙로 좌측 편에서도 가로와 세로 형태의 ‘安東方面行’과 ‘慶州方面行’ 시외버스 운행간판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간판 앞에는 승합자동차가 일렬로 서 있다. 중앙로는 1924년에 완전 개통이 된다. 이 사진을 통해 1924년 당시에 대구~안동 구간에 차량이 운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로 신작로가 더 반듯하게 개수된 이후부터는 영업 차량이 더 규모 있게 승객을 탑승시켰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한국에서 자동차 운송사업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 직후인 1910년대 초반부터라고 한다. 1937년~1938년에 경북(대구 포함)지역 여객자동차운수사업자가 수가 6개, 물품자동차운수사업자는 1개로 나타나고 있다.(朝鮮事情, 조선총독부, 1938)

1930년대 중앙로 대구역 광장에서는 두 개의 자동차조합이 시내버스를 운행했고, 대구역 건너편 대로변에 대구를 벗어나는 시외버스정류장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태평로와 교동이 만나는 대로변에 ‘안동방면행’ 버스 간판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구지역 근대생활사 기록지를 보면 1928년경 대구에서 출발해 포항, 흥해․영덕, 군위․의성, 상주․점촌, 김천, 안동 방면으로 운행노선이 있었다고 하니 신작로를 달리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그렇다면 안동~대구 구간 신작로 완공은 언제쯤으로 볼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연도를 단정하기 쉽지 않다. 1928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안동~대구 구간의 완전개통이 미흡했을 때 대구~영천~신녕~안동 구간이 활용됐을 수도 있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의성방면으로 자동차가 원활하게 운행하려면 안동읍내 낙동강을 넘어가야 한다. 안동교가 준공된 시기는 1934년으로 알고 있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조성된 안동교 이전에는 어떻게 자동차가 강물 위를 지나갔을까? 그 의문은 1931년 5월10일자 신문기사에 ‘안동읍 낙동강 沈水橋(대구행도로변)’에서 찾을 수 있다.

1926년 5월23일 동아일보에는 ‘죽령은 경북과 충북의 관문으로, 죽령을 넘어가는 ‘治道起工’ 제목으로 그해 연말까지 완성할 것이라는 기사가 있었으나 죽령을 넘어서는 신작로는 1933년이 되어서야 완공이 된다. 이렇게 대구~안동~영주를 관통하는 남북 종단도로는 이후 국도5호선의 초기 모습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신작로에 얽힌 스토리는 희미하고 사라졌을 뿐

2010년 발간한 안동현대사 총람 중 도로 편에서는 ‘1930년대 안동과 그 주변을 통과하는 주요 도로는 2등도로 3개, 3등도로 4개, 등외도로 6개가 있었고 안동지역 자동차 및 화물차가 각각 13대이다’는 단편적인 부분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1931년 2등도로는 대구~안동과 함창~안동, 충주~영덕의 현황만 기록돼 있다.

<사진8> 1935년경 안동의 버스운전사. 2019년 옛사진공모전에 김의광씨가 출품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 김순용씨는 1914년생으로 당시 운전면허를 취득해 승합자동차를 운행했으며 회사직원들과 야유회를 다녀오다 안동 길안면 묵계서원 앞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소장자 김의광(경북기록문화연구원 수상작품집)

사진8은 옛사진 공모전(2019년)에서 대상으로 선정된 <1935년경 안동의 버스운전사>이다. 촬영 장소를 단번에 파악할 수 없어 해상도를 높여 관찰해 보니 뒷배경에 안동시 길안면 묵계종택 누각과 문루로 밝혀졌다. 출품한 김의광의 아버지 김순용은 1914년생으로 당시 운전면허를 취득해 승합자동차를 운행했고, 회사직원들과 야유회를 다녀오다 촬영한 기록물이었다. 운전자 2명과 여차장 3명이 차량에서 잠깐 포즈를 한 모습이 이채로웠다. ‘경북846’ 번호판과 오가다(버스)를 불리던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이다. 길안면 방향으로 운행을 했다면 어느 구간 신작로를 지나갔을까 궁금해 질 것이다. 1931년 도로현황을 살펴보니 의성~청송에 3등급 도로가 개통돼 있고 길안면을 경유하고 있었다.

<사진9>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에 게재된 ‘안동읍 본정통 거리’. 원도심 신작로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다. 100여 년 전 근대시기 향토사와 스토리는 몇몇 조각만 남아 있고 대부분은 희미하고 사라지고 있다.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건설될 때 일본인들은 ‘교통혁명’ ‘문명의 이기’ ‘한국판 Highway'라고 칭송했지만 한국인에게는 일직선의 도로와 가로수는 ’수탈‘과 ’재산침해‘, ’부역‘에 시달리는 원망의 표적이었다. 그렇다보니 신작로에 대한 심정을 구구절절하게 읊은 아리랑타령이 등장했다.

약간 비껴나간 얘기이지만 1931년 개통된 경북선(김천~안동 구간 철도) 건설 전후배경에는 김천과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자본가 사이에 경쟁과 다툼이 극심했다. 김천 자본가들이 김천~영주 노선철도 계획을 먼저 세웠는데 이에 맞서 대구 자본가들이 대구~안동 구안철도 건설계획을 추진하자 종점을 영주에서 안동으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철도개설을 놓고 김천과 대구의 경제상권 다툼이 있었다는 걸 상기해 볼 때 도로와 철도개설의 표면적인 목적은 개발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경제적 수탈과 영구적 통치로 볼 수 있다. 100여 년 전 한반도 내륙 깊숙이 고요했었던 안동 땅으로 달려온 신작로의 기억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위 기사는 계간 기록창고(2022.여름/16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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