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권정생 작가 ‘안동 춘향이’ 수필 발굴
고 권정생 작가 ‘안동 춘향이’ 수필 발굴
  • 유경상 기자
  • 승인 2023.10.19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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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 1일 자 안동지역주간지 게재된 옥고 뒤늦게 발견

임재해 명예교수(국립안동대)는 당시 ‘안동문화권에 던져진 문제제기’로 평가

평생을 글쓰기에 전념하며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권정생(1937~2007) 선생은 작가를 뛰어넘어 사상가, 평화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생전에 직접 산문집을 발간하지 않았지만 뜻있는 문인들의 권유로 여러 권의 산문집이 발간되었다. 오물덩어리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나님, 빌뱅이 언덕등이다. 그의 글은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을 비판하며 생태와 인간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전쟁을 반대하며 이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한 평화의 사상이 담겨 있다.

그의 사후에 안동지역에서는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그의 문학 세계를 이어받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지고 있다. 선양 사업에는 그가 쓴 기록물을 수집 발굴하는 것도 포함된다.

1992년 5월 당시 인터뷰 중인 권정생 작가. 출처:김복영
1992년 5월 당시 인터뷰 중인 권정생 작가. 출처:김복영

이러한 가운데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권정생 작가의 귀중한 미발굴 원고 한편을 뒤늦게 발견했다. 199331일 자 <경북북부신문>에 실려 있는 <안동춘향이> 이다.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된 옥고이지만 당시 지역주간신문에 게재된 이후에 세간에서 잊혀진 채 방치돼 왔다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은 신문에 게재되었던 권 작가의 <안동 춘향이> 원문을 임재해 명예교수(국립안동대)에게 해설을 의뢰했다. 임 명예교수는 <안동 춘향이> 산문이 안동문화에 던지는 권정생의 충격적 문제 제기이다고 평가했다.

임 명예교수는 해설 글에서 “<안동춘향이>라는 글은 권 선생께서 안동문화의 실상에 대한 충격적인 문제 제기로 보인다. 춘향이는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안동춘향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은 물론,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체 태연하게 지내는 안동사람들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린 셈이다. 원고청탁을 해도 웬만해서는 원고를 쓰지 않는 권 선생이 <안동춘향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신문에 특별기고를 한 사실은, 아예 작정하고 안동의 지식인 사회를 향해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아래는 권정생 작가의 미발굴 <안동 춘향이> 全文이다.

[안동 춘향이]

특별기고 동화작가 권정생

 

나마 나마 청춘 나마

춘향이 나는(나이는) 십팔세요

생일은 사월 초파일이요

오늘 저녁 재미있게 놀아봅시다.

춘향아 일어나라

춘향아 팔벌려라

이동령 왔다 춤춰라

이도령 왔다 춤춰라.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겨울밤이면 마을 처녀들이 한데 모여 즐기던 춘향놀이의 노래이다.

십팔 세 나이로 불쌍하게 죽은 춘향의 넋을 불러내어 이도령과 함께 춤을 추게 하는 오구풀이 같은 애틋한 놀이이다.

남원의 성춘향이는 살아서 어사가 된 이도령과 행복하게 만났는데 안동 춘향이는 왜 죽은 것으로 되어버렸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사또님께 시달리다 옥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스스로 칼을 입에 물고 자결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춘향이 뿐만 아니라 안동지방의 민담이나 전설은 모두가 절망스럽도록 슬픈이야기로 되어있다.

흥부 놀부의 경우도 호남지방에서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하나로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안동지방 흥부 놀부는 판소리로도 소설로도 남지 못했다.

겨우 전해지는 이야기는 욕심쟁이 놀부를 톳제비들이 잡아다 자지를 열닷 발이나 길게 잡아당겨 낙동강 어디쯤에 다리를 높았다는데 그런 다리가 여태 남아있을리 없다.

심청이 이야기보다 더 감동스런 바리데기도 민담이나 무당 할머니의 입으로만 전해오다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바리데기는 죤 번연의 천로역정을 능가하는 대서사시이다.

무당이 부르던 가사에는 천별산 대장군님과 금탈병오님 사이에 딸 아홉이 태어났다고 했지만, 일반 민담에서는 그냥 어느 대감님 내외로 나온다.

아들 낳기를 기다리던 대감님댁에 아홉째까지 딸만 낳으니 화가 난 대감이 딸을 배뱅밭에 버린다.

간난아기 바리데기는 학이 날개로 덮어주고 사슴이 젖을 먹여 키운다.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대감이 병이 들어 만약이 무효하여 결국 서천시욧골(서역국) 약수를 뜨러가야 하는데 시집간 여덟딸이 모두 이 핑계 저 핑계로 가려하지 않자 바리데기가 떠나게 된다.

멀고도 힘든 길을 물어 물어 가면서 태산만큼 쌓인 장작을 패줘야 했고, 검은 빨래 희게 빨고 흰 빨래는 검게 빨아주고, 십리나 되는 긴 밭고랑을 매주고 마지막엔 더벅머리 총각을 만나 석삼 년을 함께 살며 일곱 자식까지 낳는다.

서천시욧골로 가는 바닷길엔 거북이가 태워줘 강임도령, 정임도령 담장 안의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을 꺾어 안고 돌아왔을 때는 바리데기 자신도 벌써 하얗게 늙은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대감님 내외는 그동안 죽어 해골만 남은 걸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으로 쓸어 살려낸다.

바리데기는 부모님과 친척들이 붙잡는걸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더벅머리 총각이였던 남편과 자식들 곁으로 돌아간다.

만고효녀 심청은 어릴적엔 아버지 품에 안겨 동냥젖을 얻어먹고 훗날엔 왕비가 되었지만 바리데기는 태어나면서 평생을 고난의 삶을 살았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일직면 원호리 앞 들판에는 황장사나무라 부르는 아름들이 느티나무가 있다. 솔마골에서 머슴살이를 했다는 황장군은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어느 해 여름 강건너 논에 모를 심으려고 서른 명의 일꾼을 사서 밥까지 지어 놓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강물이 불어나 건너가지 못했다. 그러자 황장군은 서른 명의 밥을 혼자서 다 먹고 헤엄쳐 건너가서 서른 명이 심도록 되어 있는 논에 혼자서 모를 다 심어버렸다.

황장군은 기운이 세어 수재개골이란 골짜기에서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기도 했고, 서울에 두고 온 부인이 외간남자와 간통을 하는 걸 알고 축지법을 써서 밤새 달려가 두사람을 단칼에 죽이고 와서 태연히 일을 했다고도 한다.

이금실(인금리)에서 이사와서 살다가 오래 전에 세상을 뜬 황씨 노인은 살았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윗대 조상 가운데 황장군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그 분이 입던 갑옷이 하회마을에 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냥 건성으로 듣고 잊어버렸는데 작년 여름 처음 하회마을에 갔다가 서애 선생의 유품전시관에서 뜻밖에 커다란 갑옷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갑옷은 서애 선생의 것이고 황장군의 갑옷 같은 건 하회마을 어느 곳에도 없었다.

돌아가신 황씨 노인이 조상 자랑하느라고 괜히 한 말 인지, 아니면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황장군이란 실존인물이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일직면 원호리에 있는 황장군나무와 여기서 머슴살이를 했다는 비운의 황장군과 황씨 노인이 들려준 윗대 조상인 황장군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전혀 다른 인물인지, 아예 이것도 저것도 모두 꾸며낸 헛소문인지 알길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황장군 같은 소문은 왜 떠돌게 된 것일까?

타지방에서 안동에 오는 분들은 차에서 내리면 자연 옷깃을 매만지게 된다고 한다. 그만큼 안동은 양반도시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서애 선생과 퇴계 선생은 세계적 위인으로 꼽힌 분들이다. 가는 곳마다 서원이 있고 사당도 많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문화는 거의 없다.

하회탈춤과 놋다리밟기, 동채싸움도 민중들의 삶의 놀이로 확산되지 못했다.

양반 그늘에서 그만큼 백성들의 목소리가 위축된 것은 추측하고도 남는다.

안동엔 전라도의 판소리나 육자배기 같은 건 물론이고, 굵직한 민요 한 가락도 남지 못했다.

낙동강 칠백리 소금배를 타고 다니던 사공들의 애환이 서린 슬픈 노래가락 하나쯤 있을 법한데, 그분들의 목소리는 왜 터져나오지 못한 것일까?

안동 춘향이가 죽어야만 했던 사연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대감댁에 며느리를 봤더니 손도 크고, 발도 크고, 간도 컸다. 그래서 집안일도 잘하고 바깥일도 잘했으며 심지어 동네 일까지 발벗고 나서서 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좋은데 한가지 걸음걸이나 옷매무새 행동이 너무 여자답지 못해 그것이 탈이 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새로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옷매무새랑 걸음걸이가 완벽해 별명을 매자구라 불렀다. 그러나 매자구 며느리는 그 많은 일을 제대로 못해 살림살이가 말이 아니었다.

결국 매자구 며느리도 쫓겨가고 이번에 들어온 며느리는 일도 잘하고 얌전한데 그게 지나쳐 융통성이 없었다. 별명이 짜자구라 했는데 너무 새침해 있으니 집안이 훈기가 없었다. 매일처럼 냉냉하게 살아가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시아버지 시어미는 첫번째 며느리가 새삼 그리워졌다. 무슨 일이나 얼렁뚝딱 해치우고 시원시원했던 며느리를 찾아나섰지만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탄식을 하면서 저녁마다 사립문을 내다보며 첫째 며느리를 기다렸다.

매자구야 짜자구야 우리 얼러리뚱띠 어디 갔노?

우리 안동은 이렇게 서민적이며 민중적인 며느리는 쌍스럽다고 배척당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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