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문화에 던지는 권정생의 충격적 문제 제기"
"안동문화에 던지는 권정생의 충격적 문제 제기"
  • 유경상 기자
  • 승인 2023.10.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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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굴 권정생 작가의 '안동 춘향이' 산문에 관한 해설

임재해 명예교수 - '안동 춘향이'는 지식인 사회를 향한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권정생(1937~2007) 선생은 한국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사상가, 평화주의자, 기독교인 이었다. 2007517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을 비판하며, 평화를 추구했다. 전쟁을 반대하며 이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인세를 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권정생 선생은 생전에 직접 산문집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산문집이 여러 권 나왔다. 오물덩어리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나님, 빌뱅이 언덕등 이다.

199331일 자 경북북부신문에 실려 있는 <안동춘향이>는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된 옥고이다. 당시 지역주간신문에 게재되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미발굴 상태로 남아 있었다. 본 연구원은 지난해 당시 장찬덕 발행인으로부터 절판된 신문을 기증받았고, 분류 과정에서 권정생 작가의 수필을 발견했다.

임재해 명예교수는 <안동춘향이>을 읽고 이 글이 당시 안동문화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점을 던진 글이라고 평가했다. 임 명예교수는 해설 글에서 “<안동춘향이>라는 글은 권 선생께서 안동문화의 실상에 대한 충격적인 문제 제기로 보인다. 춘향이는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안동춘향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은 물론,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체 태연하게 지내는 안동사람들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린 셈이다. 원고청탁을 해도 웬만해서는 원고를 쓰지 않는 권 선생이 <안동춘향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신문에 특별기고를 한 사실은, 아예 작정하고 안동의 지식인 사회를 향해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임재해 국립안동대 명예교수의 해설 글을 보탠다. <편집자 주>

안동문화에 던지는 권정생의 충격적 문제 제기

글 / 임재해 (국립안동대 명예교수)

1992년 5월 당시 권정생 작가. 출처:김복영
1992년 5월 당시 권정생 작가. 출처:김복영

안동춘향이라니? 춘향이는 남원 사람인데 생뚱맞다. 남원 춘향이와 다른 춘향이가 안동에도 있었단 말인가. 안동소주, 안동포, 안동식혜는 익숙해도 안동춘향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는 탓이다. 따라서 안동사람으로서도 안동춘향이는 낯선 말일 뿐만 아니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그것도 예사사람이 지나치듯 한 말이 아니라 권정생 선생이 경북북부신문에 특별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그러므로 더욱 의아하게 생각되기 마련이다.

안동춘향이라는 글은 권 선생께서 안동문화의 실상에 대한 충격적인 문제 제기로 보인다. 춘향이는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안동춘향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은 물론,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체 태연하게 지내는 안동사람들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린 셈이다. 원고청탁을 해도 웬만해서는 원고를 쓰지 않는 권 선생이 안동춘향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신문에 특별기고를 한 사실은, 아예 작정하고 안동의 지식인 사회를 향해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안동춘향이라는 제목은 누구에게나 의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제목을 안동춘향이라 하지 않고 춘향이 점이나 춘향이 놀이라고 했으면 익숙하게 이해할 분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춘향이 놀이는 민속놀이로 널리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권 선생께서 밝힌 것처럼 1950년대만 하더라도 마을 처녀들이 밤에 모여서 즐기던 점놀이었다. 굳이 처녀로 한정할 필요도 없다. 음력 정월 무렵에 아주머니들도 밤에 모이면 이 놀이를 즐겼다.

정해진 술래가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방망이를 신대처럼 잡고 있으면, 둘러앉은 여성들은 춘향아 팔 벌려라/ 이도령 왔다 춤춰라하고 주문을 외운다. 그러면 방망이에 신이 내려서 흔들리다가 마침내 술래가 춤도 추고 좌중에서 몰래 숨긴 물건을 찾아내는 점도 친다.

흔히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술래 몰래 둘러앉은 사람에게 숨겨놓은 다음 술래에게 잃어버린 반지를 찾아달라고 한다. 그러면 술래가 용하게 반지를 가진 사람을 찾아서 방망이로 때리는 몸짓을 한다. 이렇게 반지를 찾으면 모두 환호한다. 따라서 예사 놀이와 다른 재미가 있다. 숨긴 물건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초월적 능력을 발휘하는 까닭에 신통하고도 박진감 있는 여성들의 점놀이였다.

방망이를 신대처럼 잡고 신을 받는 놀이이기 때문에 마을에 따라서는 방망이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신내림을 받는 대상이 춘향이어서 춘향이놀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놀이는 안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춘향이놀이’, ‘방망이점놀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신내림을 받을 때 부르는 노래도 여러 가지다. 안동에서도 권선생이 소개한 것과 달리, “춘향아 춘향아/ 남원땅 성춘향아/ 나이는 십팔세/ 생일은 사월초파일/ 용마루에 어깨짚고/ 설설이 내려주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이 놀이를 하며 춘향의 신을 불러내리지만, 안동춘향이처럼 자기 고장의 이름을 붙여서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청송에서는 청송춘향이, 의성에서는 의성춘향이라고 하면 춘향이 신이 내리지 않는다. 그런 춘향이는 없기 때문이다. 춘향이 신을 내리게 하려면 춘향이의 이름과 나이, 생일, 출신지를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따라서 안동춘향이는 안동사람들에게 안동의 춘향이 문화에 대한 자극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붙여진 호명이라 할 수 있다.

권 선생의 이 글은 안동에서 전승되는 춘향이놀이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춘향이놀이처럼 안동에는 남원의 춘향과 다른 춘향이 문화가 있고 <춘향전>과 다른 춘향이 이야기가 전승된다는 데 초점이 있다. <춘향전>에는 성춘향이 옥살이를 한 뒤 과거에 급제한 이도령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는데, 안동의 춘향이 이야기는 옥살이를 하다가 죽었거나 스스로 칼을 물고 자결했다는 비극적 결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게다가 더 일반화해서 안동지역 이야기들은 대부분 절망적이거나 비극적 결말을 이루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설화의 갈래에 따라 민담과 전설의 결말은 서로 다르기 일쑤이다. 일반적으로 민담의 결말은 잘 먹고 잘 살았다와 같이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 그러나 전설은 그렇게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와 같이 비극적 결말을 이룬다. 인물전설의 경우는 인물의 계층에 따라 다르다. 아기장수처럼 민중적 인물의 경우는 아무리 뛰어나도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끝나는 반면에 김유신처럼 귀족적 인물의 경우는 성공적인 삶을 이룬다. <춘향전>은 소설이지만, 춘향 이야기는 전설인 까닭에 아기장수 전설처럼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일 뿐 안동의 지역적 특성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춘향의 고향인 남원에도 춘향은 원래 얼굴이 못 생긴 추녀 기생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춘향이 워낙 박색이어서 이웃집 도령을 연모했으나 거절당하자 물에 투신하여 자결했다는 전설이다. 주민들이 시집도 못 가고 죽은 춘향의 넋을 달래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을 뿐 아니라, 하회별신굿의 혼례마당에서 처녀서낭신이 결혼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처럼, 춘향이 연모하던 도령과 결혼에 이르는 극적인 놀이를 지역에서 전승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춘향의 혼례 놀이가 소설로 발전하여 탄생한 것이 <춘향전>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므로 안동에서 춘향이 비극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권 선생이 안동춘향이를 거론하며 비극적 결말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한갓 실마리일 뿐이다. 비극적인 춘향 이야기를 실마리삼아 왜 안동의 이야기들은 모두 절망스러운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더 일반적인 문제 제기는 왜 안동 이야기는 다른 지역과 다른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흥부 이야기와 심청 이야기, 바리데기 이야기, 황장수 이야기, 대감댁 며느리 이야기를 이어서 거론한다.

흥부와 심청은 판소리 흥보가심청가’, 그리고 소설 <흥부전><심청전>으로 전하는데, 안동에는 그런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왜 없을까? 판소리는 판소리문화권으로 알려진 호남지역에만 주로 전승되는 문화양식이다. 안동에는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같은 탈춤이 있지만 호남에는 탈춤이 없다. 안동은 판소리문화권이 아니라 탈춤문화권이다. 따라서 탈춤문화권에는 흥보가는 물론 심청가춘향가와 같은 판소리문화가 없다.

소설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흥부전>이나 <심청전>, <춘향전> 등은 모두 판소리계 소설이다. 모두 판소리문화권에서 발생된 문학이다. 게다가 안동과 같은 양반사회에서는 선비들이 소설과 같은 허구적인 서사문학을 잡성스러운 것으로 취급해서 읽는 것조차 삼가고 멀리했다.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읽거나, 한시를 짓고 읊조리는 것을 선비다운 문학생활로 여겼다. 그러므로 안동은 <흥부전>과 같은 소설을 창작하는 문인이 나타나기 어려운 문화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특별히 아쉽게 여기는 것이 바리데기 이야기이다. 바리데기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능가하는 대서사시인데, 아쉽게 세간에서 이야기되다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바리데기는 오구굿에서 구송되는 서사무가로서 주인공 바리데기가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서천서역국을 찾아가 신이한 3색 꽃을 구하여 죽은 아버지를 살려내는 이야기이다. 바리데기는 아홉 번째 딸이라고 아버지로부터 배빙밭에 버려졌지만, 저승 세계로 들어가서 생명을 살리는 꽃을 구해 옴으로써 스스로 이승과 저승을 살아서 오갈 뿐 아니라, 죽은 아버지를 살려냄으로써 죽음까지 극복하는 초능력을 발휘한다. 저승인 서천서역국을 가는 과정에 온갖 시련과 모험을 거친다는 점에서, 주인공이 하늘나라를 여행하며 여러 가지 모험을 거치는 <천로역정>과 견줄 만하다.

그러나 바리데기 이야기 역시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것으로서 안동에만 한정된 것이라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여전히 비극적 결말에 관한 것이다. 왜 효녀 심청은 훗날 왕비가 되어 영화를 누리지만, 바리데기는 평생 고난의 삶을 살다가 부모님이 붙잡는 걸 뿌리치고 다시 더벅머리 총각이었던 남편 곁으로 돌아갔을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바리데기가 오구굿에서 노래되는 굿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이며, 둘은 여성주의적 이야기라는 점이다.

굿문화의 종교적 권능은 딸을 버리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세속적 권력을 압도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버릴 수 있지만 죽음은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딸이기 때문에 버려졌지만, 무신(巫神)이어서 저승도 다녀오고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는 초월적 영험을 발휘하는 것이다. 무신은 바리데기처럼 세속적 부와 권력을 누리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천지신명처럼 자연 속에서 예사 인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오구굿과 같은 무당굿은 주로 무녀에 의해 전승된다. 굿의 세계에서 주무(主巫)는 주로 무녀들이고 조무(助巫) 노릇을 하는 반주자들은 주로 남무들이다. 따라서 굿문화를 주도하는 여성들이 여성주의적 성격이 강한 서사무가를 전승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주체적 여성으로 각성된 바리데기는 아버지로부터 버려진 딸이지만, 그러한 아버지를 미워하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자녀로서 신명을 바쳐 효도를 할 뿐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나 남성적 횡포에 종속되어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바리데기가 범부인 남편과 아이들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은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의 자의적 선택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고 의미 있다.

 

솔마골의 머슴 황장사 이야기도 흥미롭다. 힘이 워낙 세고 일도 잘하며 밥도 많이 먹는 장사여서 서른 명의 밥을 먹고 아무도 건너지 못하는 강물을 건너가 서른 명의 모내기를 혼자서 다 했다는 것이다. 힘만 세고 일만 잘한 것이 아니다.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은 물론, 두고 온 아내가 간통했다는 소문이 나자 밤새 축지법으로 달려가 간부들을 퇴치하고 아침에 태연하게 일을 했다고 한다. 기운이 충천하고 기개가 있으며 축지법을 쓸 뿐 아니라, 의리까지 갖춘 탁월한 인물이라면 마땅히 나라를 지키는 장군감으로 쓰여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훌륭한 장군감이 머슴살이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사회적 모순이자 국가적 손실이다.

세간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나자, 나라의 관군이 내려와 살해했다는 아기장수 전설은 황장사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 있다. 민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이 나타나면 나라에 등용되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반역을 꾀할까 두려워 잡아 죽이는 세상이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모순이었다. 황장사가 자기 능력을 숨기고 고향을 멀리 떠나 시골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것은,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수 있다. 그러므로 신분사회의 모순을 나타내는 민중의 이야기문화 속에는 황장사처럼 숨어사는 장사와 이인 이야기들이 많다.

황씨 노인이 자기 조상 가운데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황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황장군이 입었던 갑옷이 하회마을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회마을에 가보면 황장군 갑옷은 없고 서애 선생이 입었던 갑옷만 전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 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황장군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의미가 있다. 전설의 설득력을 높이려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므로, 하회마을 갑옷을 황장군의 갑옷으로 끌어온 것이다. 전설은 근거가 되는 증거물이 있기 마련인데, 인물전설의 경우는 주인공이 죽기 때문에 증거물이 없다. 따라서 유물이나 유적으로 증거물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갑옷이 있다는 것은 황장군의 존재를 증명하는 전설적 증거물인 셈이다.

둘은 전설적 증거물을 넘어서 박탈감을 회복하려는 의미가 있다. 황장군은 서애 선생 못지않게 전공을 세운 임란 공신이지만 아무도 기려주는 사람이 없다. 정부에서는 물론 지역사회에서도 황장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마련이다. 따라서 황장군 갑옷이 하회마을에 있다는 것은 하회마을 사람들이 황장군의 전공을 대신 가로채 갔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황장군의 업적은 기리지 않고 서애 선생의 업적만 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만이 전설적 상상력으로 재창조된 것이 황장군 갑옷이다.

권 선생은 황장군 이야기를 들려준 황씨 노인의 생각에 공감한 것은 물론 감정이입이 되어 결정적 의문을 제기했다. 왜 퇴계와 서애 선생은 세계적 위인으로 거론되고 서원과 사당도 많은데, 황장수나 황장군과 같은 민중적 인물은 제대로 기억조차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회탈춤과 놋다리밟기, 동채싸움과 같은 민중들의 문화와 공동체 놀이도 제대로 확산되지 않은 현실문제를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안동에는 전라도의 판소리나 육자배기와 같은 한국 민요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없다는 사실도 안타깝게 여긴다.

 

권 선생도 인정한 것처럼, 안동은 다른 지역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양반의 고장이자 선비사회였기 때문에 민중문화가 두드러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하회탈춤과 놋다리밟기, 동채싸움, 안동포 문화의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다른 고장에는 이런 전통이 안동보다 더 잦아들었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현재 안동 지식인사회의 현실인식이다. 잘난 사람을 더 잘났다고 기리는 데 치우쳐서 안동의 민중문화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소홀하게 한다는 점이다. 지역의 민중문화에 대한 소외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지식인 사회의 과제이다.

결국 가치관의 문제이다. 퇴계 선생이 훌륭한 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퇴계 선생이 훌륭하다는 것을 동어반복하면서 서로 누가 더 훌륭한 사실을 입증하는가 경쟁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이처럼 학자들이 지식권력의 대세에 줄을 서고 있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지역의 민중문화에 관해서는 외면하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안동이 성주의 본향이라는 것은 한국문화사에서 대단한 의미를 지닌 사실이지만, 대부분 무의미한 사실처럼 지나쳐버리기 일쑤이다. 한국 고유의 굿문화인 성주굿의 성지에 관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확실한 현장이 안동 제비원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학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재해 /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명예교수. 전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장.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 중 수많은 단독 저서와 학술논문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연구성과를 냈다. 퇴직 후 임하 금소마을에서 초보농부로 살며 강연 활동과 저술에 매진하고 있다.
임재해 /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명예교수. 전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장.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 중 수많은 단독 저서와 학술논문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연구성과를 냈다. 퇴직 후 임하 금소마을에서 초보농부로 살며 강연 활동과 저술에 매진하고 있다.

 

조선시대 시부모들이 일 잘하는 며느리보다 조신한 며느리를 찾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만큼 체면치레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현대 지식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여전히 안동학문은 조선시대 신분체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반상을 가리며 지역보다 문중 연구에 치중해 있다. 지역문화보다 특정 가문의 인물 연구에 골몰하기 마련이다. 마을에 관한 조사연구도 반촌마을에 치우치기 일쑤이다.

권 선생께서 민중적인 며느리는 쌍스럽다고 배척당했는지 모른다.”고 글을 여몄는데, 지금의 안동연구도 그러한 차별과 배척 속에 놓여 있다. 국보 하회탈을 모형으로 다듬어 팔아먹을 생각은 해도 하회탈의 국보다운 가치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려 들지 않는 것이 그러한 보기이다. 그것은 성주의 본향 안동 제비원을 묵살하는 것과 마찬가지 문제이다. 국립안동대 민속학과의 연구와 조사활동이 민속문화와 민촌마을 답사로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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