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사 재구성] - 그때 안동에서 뭐 했니껴? '댐 피해·강 파괴 맞서 生을 걸었던 진짜 안동인 故 김성현'
[생애사 재구성] - 그때 안동에서 뭐 했니껴? '댐 피해·강 파괴 맞서 生을 걸었던 진짜 안동인 故 김성현'
  • 유경상 기자
  • 승인 2024.02.1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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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동가 김성현(1954~2021), 댐피해 주민 구제지원 회피했다며 현직 대통령까지 고소 압박
마흔한 살 시절의 故 김성현. 1994년 여름, 격월간 사랑방안동(34호) 인터뷰 당시 차량 앞에 선 모습이다. 차량 코란도에 ‘물 없이 도청없다’와 ‘길안보 저지하자’ 문구를 새긴 현수막을 부착하고 운행을 했다. @김복영

[경북인뉴스] 유경상 기자 = 안동의 시민운동가 청암(靑岩) 김성현(金聖顯, 1954~2021)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민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던 김성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았다. 2012년부터 심각한 투병을 시작하며 오랫동안 은둔하며 서서히 잊혀 갔다. 지역의 큰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맹렬히 활동하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세인의 관심은 낮아졌다. 자주 보이던 사람이 뜸해지면 처음엔 궁금해 하다가 시간과 함께 망각된다. 세상인심은 원래 그렇고 그럴 수도 있다. 2021년 3월29일 마침내 그가 사망했다는 부고 문자가 날아들었다.

세상을 떠난 후 그에 대한 소소한 내 개인 기억들도 조만간 미화되거나 왜곡되기 쉽다는 걸 알기에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기록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지역유력일간지 어느 한 면에도 짧은 부고 기사가 뜨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감도 있었다. 또 하나는 그의 활동사를 짧게나마 재구성한 스토리 하나 없다는 안타까움도 더해졌다.

댐 피해 실체 파헤치며 용맹스럽게 싸운 진짜 안동인, 그의 죽음엔 무관심했다

필자가 그를 공식적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13년 1월 24일이다. 그 뒤 통화는 종종 있었다. 이 시기에 정부와 수자원공사에서는 갑자기 길안천 ‘한밤보’ 물을 취수해 남쪽지역으로 공급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시민단체와 시의회 등에서 취수 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미 안동에 대형댐이 두 개나 있는 처지에 길안천 상류의 청송 성덕댐에서 방류한 용수를 보(洑)에서 끌어간다고 하니 격렬한 반대여론이 일었다. 이 중대사안의 본질과 대처방법에 대해 제대로 짚어내며 해결방법을 제시할 전문가로 김성현 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해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좀 많이 아팠다’고 근황을 전하며 조금 회복하고 있으니 가능하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낙동강이 시원스럽게 보이는 태화동 모 아파트에서 진행됐다. 몸이 몹시 마르고 수척했다. 병색이 완연한 그는 오랜만이라며 웃으며 대화를 오랫동안 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 시간 쯤 인터뷰를 하는데 십 분씩 몇 차례 쉬며 진행했다. 건강과 관련해서 농담을 던졌다. “지난해 10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크게 아팠다. 서서히 회복이 되는 중이다. 내가 생명운동을 한다는 사람인데 이렇게 아프니 진짜 생명운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그와 진행한 인터뷰 내용은 썩 만족스러웠다. 정부는 1989년부터 길안천에 댐을 건설하려고 집요하게 시도했었고 길안면 출신이던 김성현은 그때부터 댐피해대책위원회를 만들며 댐피해 보상과 제도적 대안을 찾았고, 환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약 30년 간 현장 활동가였고 후반기부턴 생명운동으로까지 영역을 넓혀온 사상운동가로 거듭 성장했다. 댐과 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대화의 내용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했다. 인터뷰 기사 제목은 ‘물 보유지역이 수리권 갖는게 대세다’로 정했고, ‘정부가 길안천에 집착하는 건 포항제철에 질 좋은 철판 때문, 물을 가진 안동이 너무 느긋, 논리개발 서둘러야’라고 정했다.

 

시민운동가 김성현은 40대에 [댐아리랑], [꿈 실은 낙동강], [새명사상의 새 지평]을 출간했고, 50대 중반에 펴낸 [생명철학은 살림의 찬가](상,중,하)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전면 보완해 2018년 [지구를 살리는 생명철학]을 완간했다.
시민운동가 김성현은 40대에 [댐아리랑], [꿈 실은 낙동강], [새명사상의 새 지평]을 출간했고, 50대 중반에 펴낸 [생명철학은 살림의 찬가](상,중,하)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전면 보완해 2018년 [지구를 살리는 생명철학]을 완간했다.

그의 나이 60세에 이르러 활동경험이 풍부해져 있었고, 그 경험을 사상이론으로 체계화시키고 있을 때였건만, 하늘은 인재를 너무 야박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대표적인 저서인 <댐 아리랑>(1997), <꿈 실은 낙동강>(2001), <새명사상의 새 지평>(2005), <생명철학은 살림의 찬가(상,중,하)>(2010)을 펴내며 새로운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2013년 만남을 끝으로 이후에도 투병은 계속되었고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근황을 바람결에 들어보니 자택에서 ‘생명철학’과 관련된 저술을 필생의 작업으로 삼아 계속 집필을 한다는 소식만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타계하기 삼 년 전인 2018년 5월에 두툼한 책으로 <지구를 살리는 생명철학>을 출간했다는 점이다.

‘민중계란 아저씨다’ 동네 꼬마들이 먼저 외쳐주었다

필자는 대학 2학년이던 1986년 봄 당시 농민집회가 자주 개최되었던 안동문화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1988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경북북부권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던 농산물제값받기 투쟁에서는 대책위 회의에서 수십 차례 늦은 밤까지 함께 활동했다. 그때부터 농민운동과 댐피해 활동과 관련한 몇 개의 이슈에 함께 참여했거나 지원을 했었던 인연으로 이어졌다.

농민운동으로 지역사회에 등장한 그는 어느 해부터인가 ‘민중계란’ 아저씨로, 사회문제연구소의 서민법률상담가로 불리어졌다. 1989년 5월 정부의 ‘길안댐 건설예정’이 발표되는 시점부터는 길안댐 건설저지와 안동지역댐피해대책위원회를 조직해내는 주민조직 결성에 앞장섰다.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니 시민 및 공공활동에 관한 갈래가 세 개로 나누어진다. 첫째,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사회개혁운동에 대한 열정과 도전이다. 안동댐피해대책위원장, 안동사회문제연구소장, 노동빈민 지원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둘째는 제도정치권 입문을 위해 다섯 차례에 걸쳐 출마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권 입문을 위한 노력도 아웃사이드 방식과 노선을 택한 것이 이색적이다. 통칭 민주당 계열이라는 제1야당을 통한 노선보다는 제3의 민중정당을 선택하는 길로 나아갔다. 1988년 14대 총선 출마를 시작으로 국회의원 2회, 기초단체장 2회, 광역의회 1회로 총 다섯 번에 걸쳐 선거 도전을 치렀지만 진입에는 실패했다.

셋째는 200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생명운동과 생명철학으로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넓혀나갔다는 점이다. 생명철학을 집필하던 시기에 그를 괴롭히던 당뇨병이 합병증으로 더해져 힘겨운 투병생활이 계속됐지만 끝내 <지구를 살리는 생명철학>을 발간했다. 이 저서는 무려 674페이지 분량으로 매우 방대하고 두텁다.

1994년 당시 일직면 국곡보건진료소에서의 가족 모습 @김복영
1994년 당시 일직면 국곡보건진료소에서의 가족 모습 @김복영

아내 최희준 기억 - 79년 부마항쟁 때 우리집 가정교사로 들어와 결혼

안동에서의 그의 활동들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많다. 청년 김성현이 결혼과 함께 1983년 봄 안동으로 귀향하기 이전의 부산·마산에서의 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편이다. 부인 최희준의 기억이다.

1979년 당시 마산 출신인 최희준은 마산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 중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 시위에 참여를 했던 김성현이 어느 날 병원에서 간호사 최희준과 마주치게 된다. 그때 최희준은 시위 중에 다쳐 실려 온 환자를 밤새도록 치료 간호하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김성현의 마음에 최희준이 새롭게 다가왔던 것 같았다.

“잠깐 환자가 없는 틈에 그가 많은 이야기를 걸어왔어요. 안동 사람인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연애가 시작되었고 그 뒤에 우리 집에 동생 가정교사로 들어왔어요.”

김성현은 마산에서 낮에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밤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야학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이는 두 살 많은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정신연령이 높아 보였다. 친정어머니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교사였던 아버지는 사람이 똑똑하고 근면하니 고생하더라도 밥은 굶기지 않을 것 같다,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가며 네가 직장을 다니면 된다며 밀어줬다. 최희준은 김성현과 1983년 4월24일 결혼을 했다.

결혼직후인 5월9일 안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튿날부터 안동성소병원에 근무하게 된다. 1년 10개월 후에 거주할 사택이 있는 일직면 국곡보건진료소로 직장을 옮겼다. 당시 남편 김성현은 길안면 묵계에서 고추농사를 지으며 오골계, 염소를 키웠다고 한다. 부인 최희준은 일직 국곡보건진료소에서 26년을 근무하고 풍천면 신성보건진료소로 옮겨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고향 길안에서 고추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키우던 그의 관심이 농축산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목도하며 참여했던 그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사회의 개혁과 민중생존권운동에 뜻이 더 컸을 것이다. 이런 뜻이 행동으로 옮겨졌고, 지역사회에서 자주 발생한 시위대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986년 4월16일 안동문화회관 대강당과 안동역 광장거리에서 열린 농민·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 탕감 농민대회에 참여한 모습이다. 대열 중앙 세 번째 줄에 서서 누런 잠바를 입었고 가슴 왼쪽에 노란리본을 달았다. @경북기록문화연구원

농민운동 지원에 서민상담 앞장서면서도 음주는 철저히 경계

농민시위에 참여한 것이 잠깐이지만 구속으로 이어졌다. 부인 최희준은 전후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둘째 아들이 1986년 음력 7월에 태어났는데 3일 뒤에 농가부채탕감 시위 사건으로 붙잡혀 들어갔던 것이다. 그때가 건고추 한 근에 700원 할 때였다.

“그때 두 살 된 첫째 애와 갓 태어난 아이를 진료소 사택에서 데리고 있는데 젖이 안 나오니 아기는 말라가고요. 주민들이 방송 듣고 봉민이 아빠가 구속됐다고 전하니 애가 탔어요. 신부님이 찾아 와 모금한 돈을 조금 줘 미역을 사 먹은 기억이 나요.”

7년 간 이어진 전두환 군사독재 집권시기 중 1984년을 유화국면으로 불렀다. 농촌사회에서 저농산물 가격과 농가부채, 수입개방 등으로 농민시위가 거세질 때이다. 1984년에서 1988년까지 안동사회에서 농민집회는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중심으로 의식 높은 농민들이 많이 참여했던 시절이다. 경북권역 모든 지역에서 농민생존권 요구 움직임이 크고 작은 집회를 통해 거세게 터져 나왔다.

1986년 4월16일 안동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안동가톨릭농민회가 농민·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및 농가부채 탕감 농민대회를 열었다. 농민 700명, 신부와 수녀 100명이 참여한 대회를 마치고 안동역으로 진출했고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수십 차례의 격렬했던 집회는 87년 4월 전두환의 호헌조치 선언으로 6월시민항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다. 1987년 6월 항쟁과 12월 대선을 거치는 과정에도 김성현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87년 6월 안동시민항쟁과 88~89년 안동농민회 창립을 주도한 김신택의 기억이다. “내가 86년에 귀농하며 농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을 그때, 김성현 선배는 아주 적극적으로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87년 6월 안동민주항쟁 땐 자신의 짙은 회색 코란도 차량을 몰고 홍보활동을 전개했다. 11월에 양김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기 위해 상경할 때도 그의 차량을 타고 올라갔다. 특히 88년 8월부터 고추 제값받기를 비롯한 농산물 생산비쟁취 경북투쟁을 5개월 간 진행할 때 그의 지원활동이 매우 컸었다. 그해 투쟁의 성과를 기반으로 89년에 자주적인 안동농민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당시 살고 있던 일직면 농민들을 회원으로 많이 가입시켰다.”

이 시기 전후에 김성현은 ‘민중계란’ 아저씨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계란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결심을 했고 홍보방법으로 장사 차량에 스피커를 달아 민중계란이 왔다는 스피커를 크게 틀었다. 골목 아이들이 계란실은 차가 오면 민중계란 왔다는 소리를 질렀다. 안동시 태화동 서부시장 골목에 상회 겸 사무실에 차렸다. 그곳에서는 서민들을 위한 법률상담도 진행했다. 안동사회문제연구소가 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책상 하나를 갖다 놨지만 많은 상담이 이뤄졌다.

저녁마다 술이 강요되던 시절, 시대 탓으로 생활 탓으로 누구나 음주를 즐기고 있었지만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실수할 확률이 높다는 걸 철저히 경계했다. 대신 애연가였다.

1988년 사회민주당 후보로 안동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 벽보(좌측)와 1992년 민중당 후보로 안동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 벽보
1988년 사회민주당 후보로 안동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 벽보(좌측)와 1992년 민중당 후보로 안동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 벽보    

다섯 번 출마에도 미완에 그친 정치권 도전사

1988년 4월 26일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안동시선거구에 사회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권중동, 오경의, 김노식, 김성현 4명이 출마해 통일민주당 오경의가 당선되었다. 34세 김성현은 705표(1.34%)를 얻어 4위에 그치며 결과는 초라했다. 하지만 그가 내건 선거벽보는 울림이 컸다.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에서 다시 안동시선거구로 출마를 거듭했다. 민중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지만 결과는 1461표(2.59%)인 5위로 또 낙선이었다. 이 당시 소위 운동권 계열에서 두 명의 후보가 출마해 진보정치 계열이 분열을 겪으며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에 왜 단결과 통합의 진보정치를 이뤄내지 못했는가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밖으로는 진보와 민주정치를 주창했던 재야세력과 활동가들이 내부적으로는 통합과 타협에서 미성숙된 의식을 보여줬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련의 제도정치권 진입에 계속 실패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그는 왜 출마를 거듭 시도했을까? 주위 평가를 들어보면 호불호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반독재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 쟁취 및 정치세력화를 추진한 재야세력과 활동가들 사이에 이미 조직노선이 달라지고 있었다. 다수파와 소수파로 갈라지고 있었고 김성현은 사회민주당과 민중당이라는 소수정파의 길을 걸었다. 김성현은 안동에서 민중당 결성을 초기부터 주도한 인물이 아니었다. 출마를 간절하게 원했지만 현장 활동가들은 그를 경계했던 게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이 먼 저쪽의 옛날이 된 지금에서야 객관적으로 회고하고 있다. ‘정당은 출마를 하고 싶은 사람이 앞장서도록 해줘야 한다’ 것이다. 만사지탄이지만 그때의 격렬했던 내부논쟁과 각자의 선택 행위는 그냥 결과로서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두 번의 국회의원 출마를 끝내고, 그 다음부터는 기초단체장 출마로 바꾸게 된다. 1995년 제1회 기초단체장 선거와 1998년 제2회 기초단체장 선거에 잇따라 출마했다. 그리고 2002년 6월 안동시 도의원 선거에 패배한 후 정치인으로서의 도전은 마무리 되었다.

지역댐피해 보상 방법으로 대통령 노태우를 제소하다

34세부터 시작해 48세로 끝난 김성현의 정치권 도전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 수 있다.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병행하고 있었던 안동지역댐피해대책위원회 활동에서 진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91년부터 시작된 지방자치 시대는 민선의회 선출과 구성에서부터 시민운동 혹은 주민운동이 봇물이 터지듯 분출했다. 안동지역은 도청유치운동이 조직적으로 시작됐고 한켠에서는 안동·임하다목점댐의 문제점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89년 길안댐 건설을 계기로 안동·임하댐에 대한 문제를 재인식하고 있던 그는 사회문제연구소 민원상담을 통해 댐 피해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안동댐과 임하댐이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역과 주민의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한 대표적인 국책개발사업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개발에 따른 피해는 너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댐으로 인해 건강장애, 농작물생육부진, 도시발전의 낙후성 등 막대한 피해를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정부 보상의 대표적 사례로 댐개발수익금이 시민복지 증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줄기차게 싸워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도청유치를 위한 범시민 궐기대회에서 선두 운행 중인 김성현의 코란도 차량이다. ⓐ경북기록문화연구원
도청유치를 위한 범시민 궐기대회에서 선두 운행 중인 김성현의 코란도 차량이다. ⓐ경북기록문화연구원

그 방법의 하나로 당시 1991년 5월22일 노태우대통령을 제소하고 나섰다. 대통령 소장을 통해 청구취지 및 원인을 명확하게 서술했다. 특정다목적댐법 제41조에 ‘손실(피해)보상의 의무와 책임이 국가에 있음이 명문 규정화되고 있고’, 제42조 시행령에 따르는 대통령령으로 ‘구체적인 청구절차와 방법 등 필요한 사항이 규정되고 있음에도’ 행정입법이 불비된 것은 대통령의 행정입법 부작위에 해당하는 위법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해 10월 서울고등법원은 대통령 제소 사건 소를 각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하는 것으로 맞서 나갔다. 결국 대법원에서조차 상고를 기각하자 경희대 법대 교수가 나서서 대법원의 이 판결을 비판하고 나섰다.

대개 지역과 사회모순을 개선하고 개혁하기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들이 이슈파이팅에만 몰두하다가 변죽만 울리고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향이 많다. 주민과 함께 댐피해 극복을 위한 공동투쟁을 전개하면서도 현행 법과 제도상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김성현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것을 잘 인지했다. 헌법과 법률 등의 상관관계 속에 세밀한 부분을 적확하게 짚어내며 행정권과 법조계를 흔들어 냈다. 댐이 필요하다는 순기능만 강요받으며 ‘나라가 하는 일인데 우째노’라며 좌절과 허무에 빠졌던 서민과 농민에게 ‘실천과 이론을 통해 싸우면 성과가 있다’는 걸 앞장서서 보여준 것이다. 정부도 댐에 대한 인식과 정책을 조금씩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1995년 첫 민선기초단체장 출마 당시 연설 모습이다. 두 번의 총선을 출마한 이후에 1995년, 1998년 잇따라 민선안동시장에 출마했다. 34세부터 48세까지 김성현의 다섯 번에 걸친 제도정치권 진입 도전은 좌절되었다. ⓐ김복영
1995년 첫 민선기초단체장 출마 당시 연설 모습이다. 두 번의 총선을 출마한 이후에 1995년, 1998년 잇따라 민선안동시장에 출마했다. 34세부터 48세까지 김성현의 다섯 번에 걸친 제도정치권 진입 도전은 좌절되었다. ⓐ김복영

‘몇 달 더 사는 것보다 생명철학 원고를 계속 쓰는 게 생의 즐거움이다’

주마간산 격으로 김성현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건 어려운 작업이다. 그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생김새를 보면 먼저 얼굴이 꺼멓고 덩치가 큰 사람으로 다가온다.

정부를 향해 안동지역댐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싸워나가는 모습이나 각종 시위현장에서 선두에 선 길쭉한 코란도 차량 구호 현수막을 자주 목격했으니 그냥 과격한 사람이라고 단정하기 쉽다. 겉으로 비치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속마음을 아는 이들도 많다.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사람이었다. 두 개 대형댐을 만들어놓고 수량만 관리하느라 수질관리에 무심했고 그로인해 수많은 물고기들이 죽어 둥둥 떠오르는 현상을 목격하며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생명원리에 대한 고찰과 탐구가 시작됐을 것이다.

자연의 강과 인공의 댐이 충돌하는 모순을 극복하며 낙동강 상류 안동지역의 발전비전을 추구한 했다. 오십대를 넘어서며 물, 지구, 생명철학으로 대안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대단한 축복이었다고 고백했다. @경북인뉴스
자연의 강과 인공의 댐이 충돌하는 모순을 극복하며 낙동강 상류 안동지역의 발전비전을 추구한 했다. 오십대를 넘어서며 물, 지구, 생명철학으로 대안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대단한 축복이었다고 고백했다. @경북인뉴스

사랑방안동지 34호(1994년 9·10월호)에 이웃이야기로 소개된 글은 그가 마흔한 살이었을 때 스토리이다. 83년 이후 10년 동안 안동에서의 여러 활동과 가족이야기를 잘 정리해 놨다. 당시 취재 내용에서 부인 최희준이 남편 김성현의 성격에 대해 ‘개미 한 마리, 벌레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어리숙하고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그의 종교와 관련된 말하기 힘든 깊은 가족사가 있다. 1980년 즈음에 부친이 가족을 남겨놓고 수행을 위해 홀연히 출가를 한 것이다.

부인 최희준에 따르면 남편이 출가한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밤새도록 대화를 했다. 심지어 남편에게 출가를 강력하게 권유해 가족들의 애간장을 태웠다고 한다. 세속의 1차 관계인 가정을 떠나 아버지가 추구했던 가치와 지향을 이해했거나 일면 어느 측면에서 크게 공감하는 영역이 있었기에 부자관계는 매우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도를 위해 출가한 아버지의 길이 자식인 김성현이 끈질기게 추구한 생명철학과 어떤 개연성으로 연결돼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회운동, 환경운동과 예비정치활동을 거친 후 2000년대 초반부터 생명운동조직을 만들었다. 생명대학 개설과 함께 강의를 통해 수강생을 배출하고 있을 때이다. 출발점은 달랐지만 생명운동의 접합점에서 한때 깊이 교유했던 임재해 명예교수(국립안동대)는 김성현에 대해 색다른 평가를 내놓았다.

2001년 7월 발간된 <꿈 실은 낙동강> 서문에 몇 개의 추천사가 게재됐다. 이때 임재해는 안동대학교 국학부 교수였지만 안동문화지킴이 대표로 전통문화 보존과 재발견 활동에도 열정적이었다. 임 교수는 숱한 논문을 쓰며 많은 책을 발간한 연구자이지만 타인에게 추천사를 잘 써주지 않았다. 드물게도 김성현의 책 추천사에서 ‘낙동강살리기운동을 비롯한 환경운동에 진력하면서도 안동의 발전모형을 설계하는 대담한 작업을 모험적으로 시도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고 썼다. 미래의 안동을 생태문화도시로 설정한 것은 탁견이고 개척자적 구상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민족과 계급모순을 넘어서서 생명모순을 해결하고자 제3의 민속학 정립에 천착하고 있었던 임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김성현은 댐과 강의 모순점을 직접 현장에서 고발하고 대안을 찾는 생생한 경험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고 말한다. 생명운동에 관한 글을 쓰다가도 전문가를 찾아다니던 그는 불쑥 연구실을 찾아왔고 얘기를 나누다보면 배울게 많아서 메모를 자주했다고 한다. 세 번째 책 출간 즈음에 <생명사상의 새 지평>이라는 제목을 추천해 주게 된다. 김성현은 책을 발간할 때마다 전문지식을 나눠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사람을 일일이 기록했다.

생명철학 강단에 선 모습(좌측)과 낙동강사랑생명문화제(2007.10.14)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나무를 둘러보고 있다. ⓐ경북인뉴스/최희준
낙동강사랑생명문화제(2007.10.14)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나무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좌측)과 생명철학 강단에 선 모습이다. ⓐ최희준/경북인뉴스

40여 년 반려인생을 함께 나눈 최희준은 남편이 진짜로 안동을 향한 애향심이 특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타인과의 관계, 조직운영 등에서 아주 원만한 성격을 지녔던 건 아니다. 독불장군 성향도 강했다. 그러나 자연의 강과 인공의 댐이 충돌하는 모순을 극복하며 낙동강 상류 안동지역의 발전비전을 추구한 했다는 사실은 초창기 두 권 저서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오십대를 넘어서며 물, 지구, 생명철학으로 대안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대단한 축복이었다고 고백했다.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눈이 멀어지고 있었지만 저술해 놓은 생명철학 원고를 계속 보완하고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죽하면 ‘몇 달 더 사는 것보다 생명철학 원고를 계속 쓰는 것이 진짜 즐거움’이라고 했을까. 마흔한 살 인터뷰 때 “늙어 죽어서 내 이름이 불려질 때 그리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걸 소망했었다. 그에게 하늘은 늙어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지 않았다.

[위 기사는 기록창고(2022년 여름호)에 게재했던 내용을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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