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몸에 밴 사투리, 내 인생의 노래로"
"어릴 때 몸에 밴 사투리, 내 인생의 노래로"
  • 유경상 기자
  • 승인 2024.02.23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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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아, 안동 아, 서울 사람 1 - 심재경(가수)]

안동사투리에 얽힌 예천안동 출신 서울사람 이야기

[글·사진 심재경]  나는 1965년 예천에서 태어나 1973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안동으로 이사를 왔고 1976년 서울로 유학을 간 후 계속 서울에서 살고 있다. 초∙중∙고∙대학 졸업을 서울에서 했고 서울 출신 아내를 만나 서울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나 2011년 안동부설초등학교 동문합창단을 만들고 안동 사람들과 매주 만나면서 다시 절반의 안동 사람으로 살고 있다.

서울에서 안동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주제는 어린 시절 안동에서의 모든 기억들이다. 안동댐 물 가두기 전 낙동강에서 멱감던 추억, 조흥은행 앞 부종대 기억, 암산 스케이트장의 기억, 거지 무조이에 대한 사건, 문화극장 수류탄 투척 사건 등 십여 년을 매주 만나 얘기하다 보니 안동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안동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계간 기록창고>에서 더 많은 분들과 그런 추억을 공유할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며, 서울의 안동 사람들과 나눴던 얘기들을 나누고자 한다.

나는 2014년에 안동 사투리로 노랫말을 만든 두 곡의 안동말 노래와 다섯 곡의 안동 추억에 관한 노래를 모아 낙동연가 라는 독집음반을 출간했다. 특히 두 곡의 사투리 노래가 유튜브를 통해 유명해지면서 요즘도 안동, 대구 등지에서 가끔씩 초청받아 노래 하곤 한다.

심재경(예천,안동 출신 가수)
1969년 할아버지 회갑연에서, 앞줄 꼬마가 필자인 심재경

 

낙동연가 음반 

<참 조으이더> / 작사·작곡 심재경

안녕하시껴? 밥 잡샀니껴?

우리 참 오랜마이씨더, 참 좋으이더

이게 얼마마이껴? 잘 지냈니껴?

옛 모습 고대로씨더, 참 좋으이더

어른들 편하시니껴? 아들도 마이 컸겠니더

언제 같이 함 보시더, 참 좋으이더

뭐 한다고 그리 바빴는지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지냈니더

우리 인제는 자주 쫌 보시더

이래 보이 얼마나 좋으이껴? 안 글리껴?

안녕하시껴? 밥 잡샀니까?

우리 참 오랜 마이씨더, 참 좋으이더 /

‘참 좋으이더’는 2012년 안동부설초등학교 동문합창단 공연을 위해 오신 분들께 안동말로 인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낙동연가 음반의 타이틀 곡이다.

낙동연가 음반 발표 공연

<아지매쏭> / 작사·작곡 심재경

아이고 아지매요 어디 가니껴

무슨 좋은 일이 있니껴

말도 마이소 바빠 죽을시더

고마 정시이 한 개도 없니더

아이고 아지매요

뭐 그꾸 바쁘이껴

무슨 좋은 일이 있니껴

좋고 마구요 좋아 죽을시더

서울서 아들이 왔잖니껴

아이고 아지매요

뭘 그꾸 마이 샀니껴

무슨 좋은 일이 있니껴

좋구 마구요 좋아 죽을시더

우리 아가 아를 낳잖니껴

아이고 아지매요

가가 하매 아를 다 낳니껴

얼마 전에 시집을 안 갔니껴

아이고 제발 좀 그지 마소

그게 뭐가 어떠이껴

어째깨나 저째깨나

내사마 좋니더

오하라 둥둥 에헤라 디야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나

어째깨나 저째깨나

내사마 좋니더

북치기 박치기 닐리리 맘보

님 보고 뽕 따고 아싸라 비야

어째깨나 저째깨나

내사마 좋니더

오하라 둥둥 에헤라 디야

아이고 아지매요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나

아이고 아지매요

어째깨나 저째깨나

내사마 좋니더

북치기 박치기 닐리리 맘보

아이고 아지매요

님 보고 뽕 따고 아싸라 비야

아이고 아지매요

어째깨나 저째깨나

내사마 좋니더

어째깨나 저째깨나

내사마 좋니더

내사마 좋니더 /

아지매쏭은 낙동연가의 수록곡으로 엄마가 시장 보러 가실 때 따라다니며 동네 분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을 떠올려 만든 노래다.

에밀레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로 1983년 MBC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했다.

“야들아, 반갑다. 나는 심재경이따. 어애든동 잘 부탁한대이…..”

1976년 서울대방국민학교 6학년 1반 교실에서 나는 대망의 서울 입성 첫 전학 인사를 이렇게 하였다. 이런 나의 첫인사에 반 아이들 모두는 꺄르르 꺄르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의 점잖은 인사에 꺄르르 웃는 아이들이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고 그 후로도 반 친구들과 대화를 할라치면 언제나 친구들은 연신 꺄르르댔다. 나는 ‘이래가 앞으로 어애 살로? 크일이쎄’ 하는 걱정과 이런 식으로는 정상적인 대화와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아예 입을 싹 다물고 지내기로 결심했다.

안동 촌놈의 첫 서울 생활에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꺄르르 방지를 위해 질문은 일절 하지 않고, 묻는 말에만 응, 아니 또는 단어로만 대답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하는 말을 속으로 따라 하며 서울말을 연습했다. 이렇게 한 두 달여 반벙어리 생활을 한 후 조금씩 조심스럽게 속으로 연습한 서울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반응(웃나 안 웃나)을 보았고 별로 웃지 않는 걸 확인하곤 말수를 늘려 갔다.

서울말을 처음 배울 때 제일 힘들었던 건 호칭에서 ‘요’를 떼는 일이었다 선생님이나 누나, 형을 부를 때 다들 ‘선생님’ ‘누나’, ‘형’ 하고 부르는데 나는 ‘선생님요’, ‘누나요’, ‘형요’ 라고 안 하면 버릇없는 아가 된 기분이 자꾸만 들어서 그 ‘요’자를 떼내는 게 참 힘들었다. ‘(서울말 톤으로)누나요, 이거 얼마에요? 그래서 나는 한동안 더 내 말에 꺄르르 하는 서울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다.

어느 정도 서울말을 익혀갔고 내 말에 꺄르르는 없어졌지만, 가끔씩 어줍잖은 서울말 속에 나도 모르게 섞여 나오는 안동말 때문에 괜히 스스로 얼굴이 붉어진 적은 꽤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하 서울말 톤으로) ‘아이 새구라워라.’ ‘이거 농갈라 먹자’, ‘어~얘, 조심해. 띠낀다.’ ‘이거 되게 씨겁네.’ ‘얘 그 물감 매매 좀 짤파라’ 같은 말이 불쑥불쑥 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랫동안 서울말 속에 이따금 나오는 안동말(요즘도 가끔 튀어나오는)은 ‘맹’ 이다. (역시 서울 톤으로) ‘맹 다 그렇지요.’ 하하 그래도 이제는 얼굴이 붉어지진 않고 그저 나 혼자 웃을 수 있다.

어린시절의 필자

대학 시절 안동집으로 내려오는 귀향길에 안동말을 쓴 걸 후회했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마장동에서 출발하는 경기여객 버스를 타면 조령휴게소에서 쉬어 갔다. 휴게소 실내에서 담배를 피던 때라 나는 담배를 피던 50대 쯤 되어 보이는 어르신에게 나는 “아저씨요, 담뱃불 좀 얻을 수 있을까요?(안동말로)” 하고 정중히 물었는데, 담배를 피고 있는 그 아저씨는 대뜸, ‘불 없니더’라고 하는 거였다. 나는 속으로 ‘참 불친절한 양반 다 보겠네’ 하며 다른 사람에게 불을 얻어 유유히 담배를 피고 차에 다시 올랐다. 내릴 땐 몰랐는데 그 불친절 아저씨가 내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별 신경 안 쓰고 앉았는데 뒤에서 ‘어이, 자네 집이 안동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예.’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잠을 청하려는데,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어디 안동 아가 버릇없이 어른한테 담뱃불을 달라그고…어이’ 로 시작해서 집이 안동 어디냐?, 아부지 머하시노? 학교는 어디를 다니느냐? 등등 갖가지 알려주고 싶지 않은 질문을 안동까지 오는 내내 퍼부었고, 안동터미널에 내려서도 ‘이래가 안 된다. 앞장서라. 너 집에 쫌 가자.’ 며 도망치듯 걸어가는 나를 졸졸 쫓아 오는 거였다. 나는 “죄송하다고 했잔니껴? 고마 됐니더 가시소” 했지만 우리 집이 있는 조흥은행 앞까지 쫓아왔다. 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냅다 뛰어서 도망쳤다. 그때 ‘아, 내가 왜 서울말로 담뱃불 달라고 안 했을까’ 하고 큰 후회를 했었다. 그랬다면 그 아저씨가 그렇게 나오진 않았을 텐데…

이렇게 안동말을 썼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지만, 반대로 큰 낭패를 막은 적도 있었다.

수년 전 페이스북에 쓴 글을 옮겨본다.

1985년 여름. 대학 동아리 에밀레 여름 엠티를 내 추천으로 고향인 안동하회마을로 갔다. 부용대 앞 솔밭에 텐트를 치고 매일 음주 가무로 정신 없이 놀았다. 3박4일 중 마지막 날 밤, 우리 텐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다소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자들이 텐트를 쳤다. 약간 느낌이 안 좋긴 했으나 뭐 별 상관 안 하고 항상 하듯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놀았다(조별 노래 공연을 했던 것 같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옆 텐트의 다소 불량팀이 ‘어이, 우리도 같이 노시더’ 하면서 따리를 붙었다. 우리는 단칼에 ‘서울에서 내려와 엠티 행사 중이니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갔다. 우리 에밀레에도 싸움 실력은 모르겠으나 덩치는 좋은 인간들이 다수 있었고 수적으로는 밀리지 않았던 터라 세게 나갔다. ‘그럴려면 서울에서 놀지 왜 남의 동네에 와서 노느냐?’면서 행패를 부렸고 큰 싸움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아이 내가 안동 안데, 우리 동네에서 노는데 왜 그노?’ 하면서 따졌고, 그 이후, ‘어 안동?, 안동 어덴데…’ 학교는?, 아부지는 뭐하시고?’ 물으며 분위기는 급격히 누그러졌고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밤을 보냈었다.

엊그저께 안동에 행사가 있어서 내려갔다가 행사 진행팀과 뒤풀이를 하고 있는데, 저쪽 편에 앉은 사람이 자기가 에밀레를 잘 안다고 했다. 옛날 하회 부용대 앞에서 만났었다고. ‘어? 그때 만난 사람은 다소 불량팀 밖에 없었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다소 불량: 내 옛날에 거 본 적 있니더. 하회 부용대 앞에서.

-나: 그마, 그때 그 건달 긑은 사람 중에…..

-다소 불량: 야, 내가 그중 하나랬니더.

-나: 아이게이, 근데 그때 왜 그랬니껴?

-다소 불량: 우리는 낼 모래 전부 군대 가야 되는데, 서울서 야시시한 아들 노랫 소리를 들으이 고마 정시이 헷가닥 해가지고,… 하이튼 머 그래 됐니더. 이 가게가 우리 마누라가 하는 거씨더.

-나: 어애 이런 인연이….

-다소 불량: 담에 안동 내리 오마 딴 데 가지마고 울 집에서 잠자소.

- 나: 아, 예…….

참 살다 보니 별 인연을 다 만난다.

지금도 안동을 내려갈 때면 꼭 그 선술집에 들러 다소 불량 형님과 반갑게 조우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1970년 봄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예천읍 서울치과의원 앞에서. 왼쪽이 필자.
1970년 봄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예천읍 서울치과의원 앞에서. 왼쪽이 필자.

다부로 다부가

사투리와 관련된 페이스북에 올렸던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더 소개하자면 이렇다.

모교 안동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 동문체육대회 때 3년 선배인 권순자, 박희성 두 누님의 서울에서 안동 내려가는 실제 상황 이야기이다.

참고로 권순자누님은 원단 안동 아지매, 박희성 누님은 부속을 나온 서울내기 아줌마였다.

(다부 는 경상도 말로 다시 란 뜻이고 안동 IC에서 102킬로 지나서 다부IC가 있다. 다부동 전투로 유명한 곳이다.)

권순자: 야이야 여 어데로?

박희성: 어, 다음이 다부라는데?

권순자: 머? 다부라꼬? 그마 한참 지났네. 다부마 다부 돌아가야 되는데,

박희성: 어, 나 다부 잘 가고 있어. 걱정하지 마.

권순자: 아이, 다부에서 다부 돌리가 가야 된다꼬.

박희성: 얘 뭐래니? 다부 가라해서 가고 있잖아.

권순자: 그이 다부로 나가가 다부로 다부 드와야 돼.

(다부IC를 나온 다음에),

권순자: 야이야, 다부로 다부 드가자.

박희성: 또 다부로 가는거야? 우리 안동은 언제 가니?

요즘은 사투리(나는 사투리란 말보다는 지역 말이란 말을 선호하지만)도 하나의 문화 자산이라는 인식으로 사투리를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확산 되고 있지만 서울 중심의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지역 말을 더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지역 말을 이용한 노래, 연극, 문학작품 등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이런 지역 말,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더 많이 만들어서 보급하고 알리는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계속)

[위 기사는 계간 기록창고 18호(2023년 여름호)에 게재한 것입니다]

심.재.경

가수, 경북 예천군 출생. 1983년 MBC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우리동네사람들’ 음반 보컬로 참여했다. 2014년 안동을 테마로 한 ‘낙동연가’ 를 출반하였고, 2017년 김창기밴드 기타와 보컬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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