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사투리는 고저장단(高低長短)이 명확한 음악적인 말
안동 사투리는 고저장단(高低長短)이 명확한 음악적인 말
  • 유경상 기자
  • 승인 2024.02.28 1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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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아, 안동 아, 서울 사람 2 - 심재경(가수)]

안동사투리에 얽힌 예천안동 출신 서울사람 이야기

[글·사진 심재경] 나는 안동말로 된 노래와 안동의 추억을 담은 노래 모음집 낙동연가를 2014년에 발매했고, 그로 인해 에밀레 시절 이후 오랜만에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중 ‘타이틀 곡 ‘참 좋으이더’가 조회수 21만으로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고 두번째가 ‘아지매쏭’으로 조회수 10만, 그리고 그 다음 인기가 좋은 곡이 ‘무조이부루스’ 인데, 특히 라이브로 불렀을 때 반응이 제일 좋은 곡이다. 거지 무조이 이야기가 관객분들의 어릴 적 살던 동네의 거지에 대한 잊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 내주었다는 반응이다.  

심재경(예천,안동 출신 가수)
심재경(예천,안동 출신 가수)

안동의 3대 거지를 아시나요? 도꾸도꾸이, 무조이, 후불이

1대 거지인 도꾸도꾸이는 1933년생 우리 어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한국 이름 복덕이가 일제시대에 일본식 이름 보꾸도꾸이로 불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발음하기 쉽게 도꾸도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특이 사항으로 원래 머리가 좋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인데 전쟁 통에 정신에 병을 얻어 거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안동 시내를 다닐 때면 일어, 러시아 등의 외국말을 유창(?)하게 쏼라쏼라 하고, 길바닥에 분필로 수학 문제 같은 걸 풀어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곤 했다고 하는데 나의 도꾸도꾸이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기억하는 안동의 1대 거지이다. 

반면 2대 거지인 무조이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다. 키가 175cm 정도로 당시로는 제법 큰 키였고, 야구 모자 같은 걸 삐딱하게 쓰고 팔자 걸음으로 안동 시내를 활보하던 모습이 선명하다. 그의 주특기는 교통정리였는데, 안동의 시민체전이나 주요 행사가 열리면 어떻게 알았는지 반드시 나타나서 호루라기를 불며 엉터리 교통정리를 하였다. 이에 익숙한 안동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수신호를 신경쓰지 않지만 가끔씩 외지 사람들이 그 신호를 따라 가다가 식겁을 하곤 무조이를 타박하는 모습은 우리 지역 사람들이 공유하는 무조이의 재미난 모습, 우리 또래의 친구들이 함께 기억하는 모습이다. 자신도 뭔가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려는 착한 마음 또는 영업 마인드(?)에서 출발한 행동이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무조이는 행색과 정신 상태가 옳잖아서 그랬지 원래 품성은 착했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 

무조이와 비슷한 시기에 안동시내를 다니던 3대 거지는 여자 거지 후불이. 산발한 머리에 사시사철 한가지 패션으로 있는 옷 없는 옷 몽땅 껴입고 다녔던 후불이. 도꾸도꾸이, 무조이에 비해 행색이 너무 엽기적인 지라 다들 가까이 하기 꺼려했던 여자 거지. 90년대 이후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안동에서 거지를 구경하기 힘들었고, 기억에 남는 유명 거지의 맥도 이쯤에서 끊긴 것 같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는데, 그 시절 국회의원 이름은 몰라도 거지의 이름은 기억하니 나름 의미있는 삶이 아닐까?   

<무조이 부루스>  
나 어릴적 살던 동네에 유명한 거지가 있었지
그 이름 무조이 누구나 아는 그 이름 
훤칠한 키에 삐딱한 새마을 모자 
당당한 팔자걸음 동네 백바퀴 
휘리릭 휘리릭 호각을 불면서 
차빼~차빼~ 고함쳤지 
오~ 무조이 무조이 누구나 아는 그 이름 
그 이름 무조이

내 여동생 말썽을 부리면 울 엄니 말씀을 하셨지
너 자꾸 이러면 무조이 한테 시집 보낸다
훤칠한 키에 삐딱한 새마을 모자 
당당한 팔자걸음 안동 백바퀴 
앞집에 뒷집 옆집에 그 건너집 까지
얘도 쟤도 무조이 색시 
오~ 무조이 무조이 온 동네 인기 신랑 감 
그 이름 무조이
오~ 무조이 무조이 누구나 아는 그 이름 
그 이름 무조이

1960년대 말 안동 원도심 거리 풍경. 1968년 안동농림고등학교 학생들이 체육대회 행사에 앞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안동시내 중심가 삼산동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안동지점 거리와 상가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출처:경북기록문화연구원)


안동껑꺼이라 부르는 건 차별과 질시 마음 반영된 것

나는 향토학자도 아니고 국어학자도 아니지만 안동을 노래하는 가수란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안동말, 안동의 역사, 안동의 특산물 등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어 개인적으로 공부도 하였고, 지역행사, 사투리 관련 학회 등에도 초대 되다 보니 자연스레 이래저래 얼치기 사투리 전문가, 지역 전문가가 된 거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안동말의 특징
매우 간편 간결하다 vs 불친절 
음악적이다 vs. 촌스럽다. 거칠다 
마음으로 통하는 말 vs. 무뚝뚝

나는 흔히들 생각하는 안동말이 투박하고, 거칠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촌스럽다는 말에 동의 하지 않는다. 다소 그런 느낌이 있을 수 있으나 타지 생활을 오래한 나로서는 어디에나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 걸 보았기 때문이다. 안동 사람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고 상냥하고 멋지고 고급스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았기 때문에 안동 말이 그저 거칠고 무뚝뚝하고 촌스럽다는 것에 동의 하지 않는다. 안동말은 매우 간결하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말, 마음으로 통하는 보다 정적(精的)인 말, 그리고 고저장단이 명확한 음악적인 말이라 생각한다. 

껴를 쓰는 지역 사람들을 일컬어 안동 껑꺼이, 예천 껑꺼이, 영주 껑꺼이 등으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이 명칭은 아마도 타지역 사람들이 안동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한 차별적 표현이라 생각되어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예를 쓰는 대구사람들은 ‘대구 예쟁이’, 여를 쓰는 상주 사람들을 ‘상주 여쟁이’라고 부르지 않는 데 유독 안동 사람들만 껑꺼이라고 부르는 데는 우리지역 사람들에 대한 타지역 사람들의 질시의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투리 연구서적, <경상도 우리탯말>

그럼에도 안동말이 무뚝뚝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오랜 유교 전통이 강한 안동 사람들의 기질적 특징으로 자기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치 않아서 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외지 사람들의 눈에는 무뚝뚝함과 불친절로 비춰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동창회 같은 곳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첫 인사로 우리는 “아, 재겨이라?”, 또는 “왔나?” 하고 퉁명스럽게 인사를 한다. ‘반갑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둥 길게 인사를 늘어 놓지 않는 것(가족간에 길게 인사 안 하듯이)이 오히려 친함의 척도라 여기는 정서, 아니 아고 모니 모는 이심전심의 정서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저의 옛 직장 선배가 들려준 옛날 안동 금성사 대리점에서의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를 나누어 본다. 
신혼 부부로 보이는 부부가 금성사 대리점에 들어 와서 물건을 구경하고, 사장님은 가게 멀리 중앙 카운터에 근엄하게 앉아 있다. 

부인: 사장님 이 티브이 얼마에요?
사장: 거 쓰애 있잔니껴? 10만원이라꼬
부인: 이 다리미는 얼마에요?
사장: 아 그것도 다 쓰애 있니더만….
부인: 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시면 안 되나요? 손님도 없는데.
사장: (여전히 근엄한 목소리로) 참나, 친절하게 가격 다 적어 놨니더만,,,, 손님이있으나 없으나, 내가 여 있으나 거 가나 가격은 맹 똑 같니더.

70년대 물건이 없어서 못 팔던 배짱장사 금성사에서는 흔히 있었던 일이겠지만, 안동 사람의 강직한 말 톤이 더해져 더 불친절하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안동 사투리로 사랑고백은 어떻게 할까?

안동에도 친절한 사람이 있었다. 안동의 최고 친절 사원은 아마도 스쿨 서점의 살살이 아저씨가 아닐까? 70년대, 80년대 안동분들이라면 적어도 한두 번은 스쿨 서점을 이용해 봤을 것이다. 나는 주로 어린이 월간지(어깨동무, 소년중앙)를 사기 위해 갔었는데, 처음엔 자그만 체구에 다분히 여성스럽고 친절하기도 한 살살이 아저씨가 참 좋았다. 세상에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슬슬 안면이 익어가면서 이 아저씨, 친절해도 너무 친절하다. 너 아부지 하시냐는 기본, 몇학년 몇반이냐, 담임은 누구냐 등의 귀찮을 정도의 온갖 질문을 하면서 옆에 찰싹 붙어 다니는 바람에 그 후엔 일부러 이 아저씨가 안보일 때 만 들렸던 것 같다. 스쿨서점이 없어져서 살살이 아저씨의 기억도 거기에서 멈추게 되었지만 딱히 안타깝지는 않다.

안동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고백하나? 요즘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안동 사람(이는 경상도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될 듯)에게 직접적인 사랑 고백은 힘든 일인 것 같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라는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오죽하면 티브이 코미디에서 경상도식 ‘사랑해요’가 ‘내 아를 나도’ 였을까. 그러면 안동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을 고백할까? 그래서 만든 노래가 ‘거를 저거 하니더’ 이다. 

<거를 저거하니더>
여요 여쫌 보소. 여요 날쫌 바주소
내가 거를 얼매나 저거하는 동 아니껴?
여요 여쫌 보소 여요 날 쫌 바주소
내가 거를 얼매나 저거하는 동 왜 모니껴
어애야만 내 맘을 알리껴? 
속을 디베 보애야 될리껴?
아이개이 아이개이 속에 천불날라 그니더
보소 내가 진짜로 거를 저거한다 그잔니껴?
보소 내가 진짜로 거를 억수로 저거하니더.
이거는 오케씨더.

필요시 표준말 해석 아래 (필요없을 듯 하지만)
여기요 여기 좀 보세요. 여기 나를 좀 봐 주세요.
내가 거기를 얼마나 저거 하는지 아세요.
여기요 여기 좀 보세요. 여기 나를 좀 봐 주세요.
내가 거기를 얼마나 저거 하는지 왜 모르세요.
어떻게 해야만 내 맘을 알겠나요?
속윽 뒤집어 보여야 될까요?  
아이고야 아이고야 속에 천불이 날라고 하네요.
보세요 내가 진짜로 거기를 저거한다 그러잖아요
보세요 내가 진짜로 거기를 대단히 저거합니다.
이것은 정말이에요. 

안동말과 표준말의 획수 비교
안동말과 표준말의 획수 비교

안동말의 장점은 카카오톡을 할 때 안동말을 써보면 느낄 수 있는데, 안동 말로 카톡을 하면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 됨에도 글자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의미 전달이 충분하다면 말하기 쉽게 변형 하는 우리 안동 선조들의 지혜의 발현으로 진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과연 그럴까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래 단어들에서의 줄어든 획수 비교를 보시고 꼭 한번 직접 경험해 보시라. 

이 외에도 복모음을 단모음화 하려는 경향 (관광 – 간강, 활화산 –할하산, 과학 –가학, 과자-까자) 또한 듣기에 다소 촌스러울 수 있지만, 쉽고 간결한 커뮤니케이션 이란 측면이서 엄청 편리하고 일견 진화 발전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간결한 안동 말로 인한 재미난 피해 사례 에피소드가 있다. 안동 출신의 선배 한 분이 물류 창고 관리 일을 하며 신입사원과의 있었던 일을 얘기 해주었다. 

물류 창구 업무를 위해 신입 사원에게 업무지시를 내린다. 
안동 선배: 어, 신입, 이거 좀 여다 주여 보래
서울 신입: 아, 뭐라시는지??!!
안동 선배: 여다 주여 보라꼬…. 아이 거 마고 여다가
서울 신입: 아,,,,여…. (뭐래?)
안동 선배: 거짜 마고 이짜….. 요다 주여…. 아이 댔다댔어..
이 신입 사원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고 한다. (번역은 필요 없겠지요?)

 

안동말은 음악적? 가가 가가가? 그리고 2의 2승, E의 2승

‘가가 가가가? (걔가 가씨냐?)’ 를 안동말 억양으로 읽으면 이해가 되지만 서울말로 읽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음의 고저(억양)와 생략음을 장음으로 읽을 수 있느냐 그렇지 못 하느냐에서 판가름이 난다. 그리고 2의 2승, E의 2승. 안동말로 하면 2와 E 음의 고저 차이로 구분이 된다. 그러나 서울말로 하면 이런 고저 구분이 없어서 꼭 영어 E의 2승 이라고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5의 5승, O의 5승도 마찬가지. 

시간이 지나면서 말은 자연스럽게 알게 모르게 변화한다. 60년대 한국영화를 보면 왜 말을 저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80년대 서울 사람들의 거리 인터뷰 장면을 보면 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그때는 그런 말이 가장 표준적인 일반적인 말이었고 거기서 변화하여 지금의 말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개인의 판단이지만 서울말(말투, 억양)의 변화를 보면 다른 어느 지역의 말보다 더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서울말의 특징인 끝을 올리는 거라든지 하는 특징이 사라지면서 서울말이 많이 무뎌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안동말은 변화의 폭이 서울말 만큼 드라마틱 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아직도 안동말엔 앞에서 설명한 고저(高底)가 살아 있고 장단(長短)이 살아있다. 그래서 안동말이 더 음악적이다. 외지사람들이 이를 처음 듣고 마치 싸우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고저장단이 살아있는 음악적인 안동말을 이해 못하는 그들의 음악성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10여 년 전 서울에서 시작된 안동교대부속초등학교 동문들로 구성된 합창단을 하며 매주일 안동 사람들과 모여 안동 추억을 회상하며 안동말로 수다를 떨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합창 이외의 재미난 창작물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일종의 사투리극인 ‘어청전(어구씬 심청전)’이다. 

이를 감상한 안동 엠비씨의 이정희 기자는 어떻게 안동말을 이렇게 원단으로 구수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며, 우리가 녹음한 안동말이 지금은 안동에서 잘 쓰지 않는 옛날(아마도 8,90년대) 안동말이라고 했다. 서울 토박이말이 서울에서는 사라졌지만, 미국 LA 한인타운에는 남아 있다는 누군가의 얘기가 생각났고, 제주 출신 후배가 제주말에는 옛 조선 고어가 많이 남아서 고문공부가 쉬웠다는 얘기도 생각이 났다. 

말의 변화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여러 사람, 여러 요인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부지불식간의 변화라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서는 또 한편으로 옛날의 원형을 그리워하기도 하기도 하고 옛 것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도 한다. 안동에서 매년 안동문화원 주관으로 사투리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투리의 보존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실시되는 사투리경연대회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있고 지속해야할 가치가 있는 행사라 생각한다. 

사투리를 사랑하는 사투리 향토가수로써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지역 분들이 우리의 고유한 문화 자산인 멋진 안동말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 자긍심을 높여 더 잘 보존하고 널리 사용 되기를 희망해 본다. 지역을 소재로 하는 보다 많은 예술 창작물들이 나와서 사랑을 받게 된다면 보다 자연스럽게 안동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위 기사는 계간 기록창고 19호(2023년 가을호)에 게재한 것입니다]

심.재.경

가수, 경북 예천군 출생. 1983년 MBC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우리동네사람들’ 음반 보컬로 참여했다. 2014년 안동을 테마로 한 ‘낙동연가’ 를 출반하였고, 2017년 김창기밴드 기타와 보컬로 참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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