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노(如奴) : 자신을 종과 같이 하라 (1)
여노(如奴) : 자신을 종과 같이 하라 (1)
  • 김대호
  • 승인 2009.02.18 2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즈음 내 화두는 개인적, 정치적 매력과 철학이었다. 철학은 올바른 인식(노선)의 기초이고, 매력은 감정적 끌림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매력과 철학에 대한 고민은 곧 우리가 공유하는 컨센서스(사상, 이념)에 대한 대중적 호소력, 전달력을 어떻게 극대화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따라서 연구자 몇 사람이 연말 연초에 잠깐 부여잡고 버릴 화두가 아니다. 기존 양당 구도를 뿌리째 흔들어 보겠다는 너무나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이라면 몇 년에 걸쳐서 수천수만 명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화두이다.

개인적으로 부여잡고 한 사색을 두어 차례에 걸쳐서 나눌까 한다.

연초에 집 청소와 책 정리를 하다가 딸애가 사온 특이한 책이 한 권 있어서 펼쳐들었다. <잡인열전(雜人烈傳)>(이수광, 바우하우스)이다. 부제는 ‘파격과 열정이 살아 숨 쉬는 조선의 뒷골목 히스토리’이다. 내용은 조선 최고의 협객, 노름꾼, 대리 시험꾼, 사기꾼, 주당 등 수십 명의 이른바 잡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 정치적 매력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이 중 ‘조선 최고의 왈자(曰子), 김이’ 편이 눈에 들어왔다. 왈자는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 인데, 통속되는 가장 비슷한 단어는 기둥서방이 아닌가 한다.

새로운 지식 공유차원에서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시대에는 기생들을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누었다. 일패는 소위 춤과 노래만 하여 예인과 같은 경지에 오른 기생들이고, 이패는 가무를 하면서 은밀하게 몸을 팔기도 한다고 하여 ‘은근짜’라고 하고, 삼패는 다방골이나 색주가의 기생으로 전문적으로 매춘을 했다. 이들보다 더욱 격이 떨어지는 것은 돗자리를 들고 다니면서 술과 몸을 파는 ‘들병이’들이었다.(중략) 조선시대 화류계를 주름잡은 사람들은 왈자들이다. 왈자들 중에 가장 많은 이들이 별감(대궐 근무 말단 직원)이고, 다음이 검계(오늘날의 조폭) 같은 무뢰배나 악인(樂人=음악가)들이다. 별감이나 검계가 아닌 왈자들은 대부분 음악과 춤에 조예가 깊은 자들로 기부(妓夫) 또는 창부(娼夫)라고 하는 기생들의 남자였다.” (p 34)

‘기생 오래비(오빠)’의 연원은 이 기부나 창부에 있지 않나 싶다. 어쨌든 이들 왈자들이 하는 일은 기생을 찾는 손님들과의 중매(윤락 알선), 기방의 여흥 주도, 기방의 싸움 관여 등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김이’라는 사나이가 조선 최고의 왈자가 되었을까?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혹시 김이가 음악과 춤이 예인의 경지에 오른 창부? 아니다. 카사노바 같은 최고의 정력가에 난봉꾼? 아니다. 전설적 조폭 두목? 아니다. 그러면 수백 명의 기생을 거느린 국제화된 윤락 사업의 창업자? 전혀 아니다. 김이가 조선 최고의 왈자가 된 것은 거의 모든 기생들이 가까이 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고 싶어 하는, 한마디로 최고의 ‘매력남’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찌해서 김이가 이런 경지에 올라갔을까? 책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기생들의 총아가 된 김이는 평생(젊을 때 한때가 아니다)을 기생들의 치마폭에 파묻혀 살았다. 그가 죽을 때가 되자 소위 협사들이 몰려와 기생들에게 사랑받는 비결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김이는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한 뒤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은밀하게 말해 주었다.

‘여노(如奴)’

자신을 (기생의) 종과 같이 하라는 뜻이다. 김이가 기생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이유는 기생들을 모욕하지 않고 상전처럼 받들어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p 33~34)

김이는 당시 멸시천대 받는 기생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해 주고, 함께 있을 때는 마치 종처럼 그들이 노래를 부르라면 노래를 불렀고, 춤을 추라고 하면 춤을 추고, 재밌는 재담으로 (남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 업인) 기생들을 즐겁게 함으로서 뭇 기생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종처럼 낮추었다 해서 몸과 마음이 망가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큰 사랑과 자유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끌리는 사람이 가진 매력의 원천

사람의 개인적 매력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쏟아낸 수많은 얘기를 한 단어로 집약하면 바로 ‘여노’다. <끌리는 사람의 백만 불짜리 매력>(브라이언 트레이시, 론 아덴, 한국경제신문)이 라는 책도 이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주요 목차는 이렇다.

‘자신의 이미지보다는 상대의 관심사에 집중하라’ ‘상대방의 자존감을 최대한 세워주어라’

‘대화의 목적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대화의 목적은 상대방이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물어라’ ‘아니야! 라고 외치고 싶더라도 머리는 쉼 없이 끄덕여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똑똑한 사람보다는 편안한 사람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 ‘똑똑한 사람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라’

'(빌 클린턴처럼 매력이 넘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에게 올인 하고 집중한다....... 백만 불짜리 매력의 기본은 언제 어디서나 상대를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다. 당신의 순수한 감정을 넘어서 말이다.(앞의 책, p 38)
‘사람들은 주인공 같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주인공처럼 만들어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에게 한없는 고마움과 친밀감을 느낀다. 사람을 얻고 싶다면 상대를 영웅으로 만들어라(앞의 책, p 40)

사업하는 사람들의 상식도 돈 자체를 쫓으면 돈이 달아나지만, 고객을 상전처럼 받들어 모셔서 그 마음을 사면 돈이 따라 온다는 것이다. 이는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지만 김이가 전수한 비결 아닌 비결처럼 역시 아무나 실천하지 못한다.

초심자들이 피아노를 배울 때도, 수영을 배울 때도, 골프를 배울 때도, 글쓰기(작문)를 배울 때도 힘을 빼야 한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다. 왜 힘이 왜 들어가는가? 그것은 대체로 주관적 선입견 때문이다. 골프공을 멀리 날리려면 있는 힘을 다해 쎄게 때려야하고, 멋진 글은 미사여구가 많은 글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영을 빨리 배우지 못하는 것도 거의 대부분 두려움(선입견)으로 몸이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불필요한 힘이나 겉멋의 배후에는 대체로 자기 자신의 오랜 선입견, 고정관념, 과도한 욕망과 집착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원과 해탈의 길

여노(如奴)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 기본이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비우는 것이 기본이다. 이 빈 공간에 섬기는 자 또는 자신이 사랑을 받고 싶은 존재의 욕망과 집착을 채우고, 이를 치열하게 실천해야 한다. 한마디로 여노는 자신을 죽이고, 타자의 의지에 자신을 던짐으로서 큰 성취와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쉽겠는가? 알아도 실천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김이가 죽기 직전 무슨 비결처럼 귀띔해 준 것이다.

하지만 뭇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비결도, 배우자로부터 사랑 받아 큰 자유를 얻는 비결도,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는 비결도, 비즈니스(경제적 시장)에서 성공하는 비결도 본질적으로 여노의 길, 자신을 비우는 길이 틀림없다. 더 나아가 구원과 해탈의 길도,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정치적 시장에서 승자가 되는 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 복음의 알파요 오메가는 하나님/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노(如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불교 교리의 핵심-제법무아(諸法無我)-도 결국은 욕망과 집착의 주체인 자신을 해소하는 것이다. 불교 경전의 정수인 금강경은 한술 더 떠서 이런 깨달음조차도 버리라고 말한다. ‘나라는 생각/자아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절대 존재라는 생각도 없으며, 깨달았다는 생각(法相)’도 본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너무 난해하고 높은 경지다. ‘모든 相을 相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했으니, 이것을 다 이해하면 부처가 되어 버리니, 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초조해 하지 마시길. (2편에서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