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노(如奴) : 자신을 종과 같이 하라 (2)
여노(如奴) : 자신을 종과 같이 하라 (2)
  • 김대호
  • 승인 2009.02.1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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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정치적 매력

<끌리는 사람의 백만 불짜리 매력>의 저자들은 매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매력은 굳이 부탁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를 돕겠다고 나서게 하는 힘이다. 왠지 그 사람이 말하면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 사람이 부탁하면 들어주고 싶고, 그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 열리게 된다.”(앞의 책, p 8~9)

이는 흔히 소프트 파워(soft power)내지 권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정치적 매력이다. 정치적 소프트 파워다.

정치인과 정치세력의 매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개인의 처세술이 일조하기 하겠지만 아주 작은 부분일 것이다. 사실 한국 정치에 대한 불신이 아무리 높아도, 정치인 중에는 개인적인 처세술 하나는 뛰어난 사람이 정말 많다. 이들은 장례식장, 결혼식장, 동문 모임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탁월한 언변과 친화성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강한 정치적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 내지 정치세력은 아마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라는데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초기 문국현이 한 때지만 매력이 있었고, 또한 재야 민주 투사들과 386운동권 출신들도 강한 정치적 매력이 있었다. 해외에서는 미 대통령 오바마와 (절정의 자리에서 물러난) 일본 수상 고이즈미가 아닐까?

그 중에서도 한국 최대, 최강의 팬클럽을 가졌던 노무현과 2008년 세계 최고의 스타 오바마의 정치적 매력이 압권이다. 노무현, 오바마와 나머지 정치인들이 가진 정치적 매력은 ‘김이’나 빌 클린턴 류의 개인적 처세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과 집착 - 여기에는 경제성장, 일자리, 민주화, 정의, 지역주의 타파, 지역개발, 남북 화해 협력, 양극화 해소, 인종 화합 등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농축되어 있다 - 이른바 시대정신을 받아 안으려는 일관되고 치열한 태도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다가 ‘(한국 혹은 미국) 민주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힘까지 붙으면서 ‘충직하고 능력도 있는 일꾼’ 같은 이미지도 가세하여 그 매력이 몇 배로 증폭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 매력과 정치인 및 정치세력의 매력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자신이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은 대상에 대한 철저한 몰입이다. 시대정신에, 역사적 대의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노다.

노무현 시대 이후, 한국의 유권자들은 어떤 정치인과 정치세력에게 정치적 매력을 느낄까? 노무현 이전 시대의 시각으로 볼 때 이명박은 너무나 결함이 많은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 미루어 대중은 뭔가 국가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고, 특히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와 요구를 잘 실현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 뵈는 정치인 및 정치세력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인과 정치세력은 대중의 욕망과 집착을 해결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청계천-버스 중앙차로제 같은 성과와 이를 뒷받침하는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난 1년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감 이상이 안되는 재목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국가적 난제들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한, 대중의 절실한 욕망과 집착이 있는 한, 국가경영 실력은 여전히 정치적 매력의 큰 원천일 것이다.

국가경영 실력은 미네르바가 잠깐 보여 준 것과 같은 컨텐츠(전문성)도 필요하지만, 상당한 의석수와 국정 경험과 다양한 인재(전문가)풀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보면 한나라당과 박근혜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실력을 뒷받침하는 여러 요소에서 많이 뒤지는 노무현이 이인제, 이회창을 이기고, 역시 많이 뒤지는 오바마는 힐러리, 매케인을 이겼다.

사람들이 정치적 매력을 느끼는 다른 큰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투입 대비 산출/효용을 정확히 따지는 기계는 그렇지 않겠지만, 사람은 100을 가진 사람이 내 놓는 10 보다, 10을 가진 사람이 내 놓는 5에 더 감동한다. 다이아몬드 반지, 금반지 보다, 지극 정성으로 바치는 구리 반지에 더 감동한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감동한다. 이는 애인도, 아내도, 유권자도, 神도 마찬가지다. 기계처럼 무심하게 효용만 따지는 고객조차도 작은 정성에 감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은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과 정치세력은 대중의 욕망과 집착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 안으려는 태도가 정말로 중요하다. 의석수, 인재풀, 국정 경험, 출마 경험은 두 번째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12년 총선에서 한국의 주류 정치세력(양대 정당과 선진당, 민노당 등을 포함하여)의 고질병(낡은 이념, 지역기반, 빈약한 컨텐츠 등) 으로부터 자유롭고, 그 진단과 대안이 참신하고, 나름대로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는 정치 세력이 20~30석짜리 정당을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그 당은 대권까지 먹을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이 이인제를 꺽고, 오바마가 힐러리를 꺾었듯이, 박근혜를 꺽을 가능성이 크다.

매력 축과 세력 축을 넣어 새로운 정치적 좌표계를 구성해야

나는 지금도 지난 양대 선거 결과에 대한 해석과 향후 전망을 놓고, 정치권과 지식사회에서 좌클릭 우클릭, 중도좌, 중도우, 좌파연대(소연정), 영호남 지역주의 등으로 표현되는 정책/ 정무 노선만 집중 거론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정책 노선 못지않게 유권자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즉 안정감, 겸손함, 신뢰감, 진정성, 성실성, 두터움, 추진력, 유연성, 경박함, 양아치성, 표리부동, 밥맛 등으로 표현되는 정치세력의 행태(자세)나 품격이 거의 거론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만든 민주당 국민경선과 대통령선거, 그리고 2004년 총선 결과는 정책 노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2002년 국민경선 후반부에 패색이 짙어진 이인제는 좌파시비를 했는데, 이런 태도는 이인제의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다 날려먹었다. 그런 점에서 정책 노선 못지않게 행태적, 문화적 매력은 중요하다. 정치 집단의 됨됨이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자칭 진보, 개혁, 민주 세력은 지난 지방선거, 대선, 총선의 졸전에서 보여주었듯이 대중의 욕망과 집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였고, 당연히 제대로 된 해법도 내지 못하였다. 1997년의 그늘(양극화, 개방화, 신자유주의 등)은 혀가 닳도록 얘기했지만, 1987년의 그늘과 2002년의 그늘이 국민들을 이중 삼중으로 압박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정치적 매력 개념도 머릿속에서 빠져버렸다.

열린우리당 탈당쇼-열린우리당해체-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당에 이르기까지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치공학에 매달렸다. 노무현과 거리두기(때리기), 노무현 색채 지우기, 간판 바꿔달기 등은 너무나 얄팍했고, 너무나 속보였다. 눈 가리고 아웅 그 자체였다. 감동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정동영은 무슨 상품 광고하듯이, 평소 거의 내비치지도 않은 중통령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나와 흔들어 댔다.

비주류 ‘정치꾼’들은 그 동안 어디서 뭐하고 있었는지, 장이 서자 우루루 몰려나와 벤처기업에 주식투자 하듯이 제각기 부나방처럼 대선 캠프에 몰려가서 자신도 이해 못하는 정책/공약을 짜고, 연설문을 쓰고, 정치광고 카피를 썼다. 당연히 감동이 없었다. 오바마가 최소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일관되게 온몸을 바쳐서 추구한 가치를 흔들어 엄청난 감동과 기대를 모아 미국 대통령에 당선 된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자칭 진보, 개혁, 민주 세력이 보인 추태는 너무나 선명했다.

한미FTA 반대 도심 격렬시위를 하고, 여당과 정부의 중진 출신들이 단식을 하면서 정책적 차별성(정체성)을 과시했지만, 자신들의 매력, 신뢰성, 진정성은 더 앙상하게 되었다. 자중지란, 이율배반, 표리부동, 밥맛 그 자체였다. 이는 머릿속에 정책 노선의 중요성은 각인 되어있지만, 정치적 매력의 중요성은 각인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정치적 행보를 결정하는 좌표계에 X축(좌-우-중도)과 Y축(영남-호남-충청)만 있고, Z축(매력-비매력 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이 축 외에도 중요한 좌표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조직(덩치) 축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진정치세력들은 정치노선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정치적 매력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어떻게 세(지식인 네트워크와 지지기반)를 불릴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벤처중소기업 하듯이 정치노선과 (선거 컨설팅사가 전문인) 정치 공학만 고민하면 십중팔구 패가망신 할 것이다.

정치인과 정치세력은 대권이나 헤게모니에 대한 집착을 빼놓으면 시체다. 사실 정치인들만큼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 없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세상의 질서를 잡고, 자원을 할당하여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유달리 강한 사람이 정치인이다. 실제 어릴 때부터 자기 주도성이 강하고, 헤게모니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대권에 근접한 정치인의 행보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대권 전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초선 의원은 재선이고, 재선의원은 삼선이다. 적어도 언론은 그렇게 해석한다. 유권자의 종처럼 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처럼 군다. 여노(如奴)가 아니라 여주(如主)다. 그 흡인력이 박근혜처럼 일정한 임계점을 돌파한 사람은 그가 높이 앉아 있어도 세상이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돈과 인재가 빨려 올라온다. 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종처럼 낮추어야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정치적 자산이 굴러온다.

박근혜처럼 정치적 자산이 재벌급인 정치인은 두텁고 안정적이고 유연하고 통합적으로 보이면 된다. 현안들에 대해서 형편없는 헛소리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정치적 자산이 구멍가게 수준이라면, 대중의 눈길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바지런한 종이 되어야 한다. 틀린 소리만 안하는 식이 아니라 무릎을 칠만한 옳은 소리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시원한 소리를 해야 한다. 자신의 큰 욕망을 비우든지 최소한 깊숙이 감추고, 시대와 국민의 욕망과 집착에 철저히 몸을 맡기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머리(컨텐츠, 경륜)를 텅 비우고, 마음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꽉 채우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수없이 불렀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의 정신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여노가 살 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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