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나라' 유감
'왕의나라' 유감
  • 이해선
  • 승인 2011.09.0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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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을 배경으로 한 산수실경 뮤지컬 ‘왕의 나라’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한다. 안동에 사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적으로 열악한 지역인 우리 안동에서 순전히 지역의 역량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실경 뮤지컬의 제작과 공연에 성공한 것은 안동의 문화 역량을 확대하는 데 큰 기여를 하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200여명의 배우들이 지역의 문화아카데미를 통해 양성되어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은 참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참 아쉽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 아쉬움의 정체는 하필이면 공민왕의 몽진을 소재로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략으로 도성을 버리고 안동으로 몽진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원나라에 복속된 고려의 왕자로서 원 왕실의 노국공주와 혼인하였지만, 왕위에 오른 뒤에는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원과 결탁한 권문세가와 대립하며 왕권을 확립하고 국권을 회복하려고 애쓴 개혁군주였다. 공민왕의 말년에 얽힌 그렇고 그런 얼굴 붉어지는 전해오는 이야기를 난 믿지 않는다. 반대세력에 의해 얼마든지 덧칠 당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권력을 잃은 군주가 주색잡기 말고 빠질 데가 어디 있겠는가.

역사적 사건으로 되돌아가면, 어쨌거나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략에 맞서 힘 한 번 못써보고 도성을 버리고 멀리 안동 땅까지 도주하였다. 물론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끼던 친원세력과 홍건적이라는 새로운 외적의 두 위협물을 피해 몽진을 했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군주로서 결사항전 한 번 외치지 못하고 도망 온 것은 역사적 ‘팩트’이다.

하필이면 공민왕이 몽진으로 선택한 곳이 안동 땅이었을까? 홍건적의 침략과 친원세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몽진이었다는 정치적인 배경을 제쳐놓고 본다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을 좋아라할 백성은 어디에도 없다. 임진왜란 때, 도성을 불태운 것은 다름 아닌 혼자 살고자 도망간 왕에 대한 분노에 가득찬 백성들이 아니었던가?

도성 가까운 곳으로 가자니 언감생심 백성의 분노가 무서웠을 것이고, 호남으로 가자니 평야에 숨을 데가 마땅찮았을 것이고, 강원도 산속으로 가자니 적지 않은 몽진 일행이 움직이기에는 산세가 너무 험했을 것이다. 적당히 멀고 위협 받지 않을 수 있는 곳. 안동이 딱 제격이다. 고려 개국의 터전이기도 하고, 산세도 적당히 험하고,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왕에 대한 원망 보다는 동경과 충성심이 강할 수 있는 곳. 바로 안동이다.

예상대로 안동은 도망 온 왕의 일행을 그야말로 극진히 반기고 맞이한다.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는 노국공주를 위해 아낙네들이 내를 메우고 허리 굽혀 놋다리를 만들어서 그야말로 물 한방을 튕기지 않고 건너게 하는 충성심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왕에 대한 충성심이 변하지 않는 고장. 그래서 안동이 자랑스러운가? 안동 곳곳에 있는 공민왕의 몽진과 관련된 유적과 설화를 보고 들을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외적의 침입에 맞서 결사항전 하지 못하고 서둘러 도망 다녀야 했던 슬픈 역사. 공민왕뿐만 아니라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왕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몽고 침입 때 그랬고, 임진왜란 때도 그랬다. 왕이 도망간 자리에 버려진 백성들이 일어나 외롭게 외적과 싸우거나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도망 온 왕을 위해 백성들은 노역에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 흔적이 지금도 청량산에, 왕모산에 적잖이 남아 있다.

굳이 공민왕의 몽진이 아니라도, 안동을 소재로 한 이야기 ‘꺼리’는 얼마든지 있다. 조선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고, 그 반이 안동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독립투쟁을 벌인 안동의 지사는 그 얼마이며, 의병장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얼마 전 공연했던 ‘락,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가 있어 좀 위로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내가 뮤지컬 왕의 나라라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만한 전문적인 소양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본 드라마 그 자체에 대해서 비판한 생각은 전혀 없고, 이 공연을 위해 노력하고 땀 흘린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눈곱만치도 없다. 오히려 그 분들의 수고에 박수쳐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다만, 공민왕의 몽진이 안동을 ‘폼’나게 할 만한 이야기 ‘꺼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이유가 어땠던 간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멀리 도망 온 왕을 극진히 모신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적 ‘팩트’를 각색하고 포장한 이야기가 안동의 문화적 소재가 되는 것이 못마땅할 뿐이다. 고생한 분들의 힘을 빼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안동의 역사가 드러나는 이야기 소재를 가지고, 지역의 전통을 실물로 드러내는 풍부한 고택자원에,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가미하여 안동에서만 볼 수 있는 산수실경 뮤지컬이 안동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발전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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