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마당] ② 동심을 한없이 들뜨게 했던 - 가설극장
[추억마당] ② 동심을 한없이 들뜨게 했던 - 가설극장
  • 김윤한
  • 승인 2009.02.22 2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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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혜택 거의 없었던 시절

60 ~ 70년대만 해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시골의 경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무척 많았다. 전기는 바로 문명이 들어오는 통로였다. 전기가 없으면 TV도 냉장고도 컴퓨터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 당시 우리 마을은 면소재지였지만 아직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수시로 바깥세상을 향해 열어놓을 수 있는 것은 귀밖에 없었다. 즉 우리의 유일무이한 문명혜택은 라디오 밖에 없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여름날 평상마루나 멍석을 깔고 앉아 모깃불을 피워 놓고 부채질하며 그 당시 유명했던 라디오 연속극 왕비열전이나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라디오 연속극을 온 가족이 귀를 쫑긋 세워가며 듣곤 했다.

영화 들온다 카드라

라디오 말고는 외부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시절 눈으로 볼 수 있는 문명의 이기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영화 들온다 카드라’ 즉 가설극장이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일순간 온 면내가 술렁거렸다.

시내처럼 영화관이 없던 시골에서는 평생 영화와는 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추위가 덜한 5월 ~ 9월 사이에는 이동식 영화관인 가설극장이 면지역을 순회하며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고 돈을 받았다.

소문이 진실로 확인되는 것은 영화 포스터였다. 그 당시 인쇄물도 무척 귀한 때라 면내 마을마다 신성일이나 윤정희 같은 배우 사진이 붙은 영화 포스터만 보면 시골 이들의 마음은 벌써 한없이 들뜨기 시작한다.

영화 포스터도 부족했던 터라 가설극장 사람들은 질 낮은 누런 종이에 울긋불긋한 염색물감으로 즉석 포스터를 그려 붙이기도 했다. 그러면 가설극장이 온다는 소문은 사실로 확인이 되고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손꼽아가며 영화를 상영하는 날을 기다리곤 했다.

이동식 영화관 설치

포스터를 붙여놓고 며칠이 지나면 가설극장 영화사 사람들이 가설영화관을 지을 장비를 싣고 들어온다. 그러면 아이들은 우 몰려가 기대에 찬 눈으로 영화관을 짓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들은 대개가 면소재지 시장 머리 근처에 자리를 잡곤 했는데 먼저 가설극장을 만들 경계마다 구덩이를 판 후 높다란 막대기를 세운 다음 가로 세로로 줄로 엮어서 바깥쪽으로 흰 천을 둘러 마무리한다.

테두리에 흰 천막을 치는 이유는 오로지 돈을 내지 않은 사람들이 영화 내용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가설극장 멤버들은 대개 10 ~ 15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어린 마음에 가설극장 구성원들은 매일 영화를 볼 수 있으니까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자중에 크면 ‘영화쟁이’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손에 손 잡고

88올림픽 때 ‘손에 손 잡고’란 노래를 주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설극장 당시에도 이들이 사용하는 홍보문구를 보면 손에 손 잡고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들이 가설극장 설치와 함께 면내 모든 마을을 돌면서 홍보 방송을 하곤 했는데 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 영화사 임시 선전반입니다. 오늘 저녁 여러분을 모시고 상영할 영화 총 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신영균 문희 주연 미워도 다시 한 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오늘 저녁 7시 가족끼리 손에 손 잡고 ○○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설극장이 설치된 곳에서는 높은 곳에다 스피커를 매달고 가련다 떠나련다……나, 눈 보오라가아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와 같은 유행가를 틀다가 사아사이 영화를 선전하는 내용을 방송하곤 했다.

아, 보고 싶어라 영화

그 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먹고 살기에 바빴던 시절이라서 일 년 내내 돈을 만져보는 일이 드물었던 터라 금액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돈을 내고 가설극장 영화를 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면 소재지에 살았던 탓에 가설극장 영화관에서는 음악소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상영하는 대한뉴스가 상영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돈을 주지 않아서 영화를 보러가지 못해 무척 안달이 나서 울기까지 했었다.

어쩌다 아버지를 졸라 영화를 보러 가는 날에 가설극장 앞에 가 보면 발전기를 돌려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전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그 전등불 주위에는 하루살이들이 무지하게 많이 몰려들어 ‘영화쟁이’들은 연신 하루살이들을 쫒곤 했다.

한 쪽에서 표를 사서 가설극장 영화관으로 들어갈 때의 그 설렘이란…… 영화관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맨바닥이었다. 영화사 측에서 가마니를 깔아놓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가 입장객들이 시멘트 부대 같은 깔고 앉을 거리를 들고 들어가야 했다.

신기하기도 해라 그림이 움직이다니

어릴 적 맨 처음으로 영화를 봤을 때는 실로 많은 충격을 받았었다. 어떻게 그림이 움직이고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영화 시작 전에 대한 뉴스라고 해서 오래된 흑백 뉴스를 반드시 먼저 보여주곤 했는데 그 때가 아마 월남전이 한창일 때여서 월남전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청룡이나 백마부대 같은 부대 군인들의 전투장면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현장이나 건설현장을 방문하는 광경을 보여주곤 했다.

그 당시 기억나는 영화로는 미워도 다시 한번이나 돌아온 해병, 돌아온 용팔이, 홍콩의 왼손잡이 같은 멜로나 액션물들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월하의 공동묘지 같은 영화는 얼마나 무서웠던가? 엄마 없는 하늘아래 같은 영화를 보고는 얼마나 펑펑 울었던가?

영화는 필름을 하도 돌려서 대개가 무척 낡은 것이었다. 그래서 늘 비가 내리는 것처럼 필름이 닳은 부분이 화면에 나타나기가 일쑤였지만 우리는 영화는 원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필름이 낡았다 보니 자주 끊어지기도 했다. 영화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끊어지면 순간 안쪽은 암흑천지가 되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입장료를 반환해 달라는 의미로 ‘돈 내놔라’를 외치기도 했다.

아련하지만 그것이 한국영화의 뿌리

지금은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고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어디나 전기가 들어가 텔레비전 없는 집이 없다 보니 이제는 시골구석까지 들어가 영화를 상영하던 가설극장을 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한 때는 한국 영화가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관객이 들지 않아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요즘도 잘 만드는 영화는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최근에는 독립영화가 100만을 돌파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처럼 한국 영화가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것은 물론 영화인들이 열심히 노력한 때문이겠지만 우리가 어렴풋이 추억에 젖곤 하는 시골 천변의 가설극장 영화에 대한 애틋한 애정과 추억들도 영화 발전에 조금은 작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본다.

김윤한
이제는 가설극장 앞 매표소의 빤한 전등불이나 영화 상영을 위해 발전기가 탈탈탈 돌아가는 소리며 자르륵 거리며 고물 영사기 돌아가던 모습, 영사기 렌즈를 통해 영화 내용들이 빛이 되어 화면 가득 비춰지던 아련한 모습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잡 안 오는 밤에 눈 감고 고향 생각을 하다 보면 그 때의 희미한 영화 장면과 함께 박노식이나 이대엽, 김진규, 남정임, 허장강, 이예춘, 김석훈, 윤정희, 신성일, 신영균 같은 배우들의 모습들도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김윤한은 현재 안동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시인이자 수필가 등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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