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별이 서툴다>
<나도 이별이 서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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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3.0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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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얼마나 많아야 좋은 책으로 느낄까. 밑줄 그을 곳이 너무 적으면 왠지 책이 부실하거나 내 식견이 좁아보이고, 밑줄 그을 곳이 너무 많으면 이걸 어떻게 다 소화하나 부담스럽기도 하고 혹 미사여구가 남발된 책을 읽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적절한 수준이란, 독자마다 책마다 기준이야 다르겠지만 분명 풀어내고 요약하고, 늦췄다 조이고 하는 흐름의 리듬이 잘 조절된 상태일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밑줄 그을 대목이 얼마나 많은지, 그 대목이 좋은지 나쁜지, 누구나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죽음을 맞기 전까지 그런 밑줄에 대해 별로 생각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앞둔 것처럼 자기 인생의 가치와 한계를 깊이 있게 따져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참으로 다행스럽기도 하면서 불행하기도 하다. 삶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을 생각지 않고 인생을 열심히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삶의 종말을 고하는 죽음을 대부분 아무 준비 없이 맞이한다는 것은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토록 큰소리치고 자만하고 깔끔 떨며 살던 사람들이 또 그토록 초라하게 죽음을 맞지 않는가.

얼마전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김 추기경은 선종 전까지 지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김 추기경은 한동안 그 병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탓하다가 나중에는 감사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김 추기경을 가까이 두려고 부르는 것이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로 여긴 것이다.

모든 사람은 불치병이나 죽음을 앞두고 몇 단계의 심리 과정을 거친다고 하는데, 아마 김 추기경은 이때부터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순리대로 맞을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나도 이별이 서툴다"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도 매일 죽음을 접하고 살아야 하는 의사 입장에서 죽음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언제가 자신도 죽음을 맞이해야 할 존재임을 서서히 인정해가면서 그 많은 사소한 듯하면서 소중한 개인들의 죽음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라는 프로이트의 말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연한 이유를, 즉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따뜻한 시선으로 전하고 있다.

<죽음 대비는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죽음을 대비하라?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죽음을 대비할 시간이나 여유 따위가 있을까. 맞는 말이다. 이 말은 <죽을 힘을 다해 살아라>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도 무관할 것 같다. 다만 가끔 기운이 빠지거나 막막할 때 왜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사는지 생각해 보라는 단서가 붙는다.

실패, 불가능, 죽음은 우리를 기운 빠지게 하고 삶을 막막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하지만 삶의 이유, 즉 목표가 확실하면 그런 무기력과 막막함이 저 먼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어쩌면 그런 장애물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일종의 무식함이 생기는 것일 게다.

알고도 속는 것이 인생인데, 행복할 수 있다면 일부러 속아주는 것도 삶에 대한 행복한 애교가 될 것 같다.

<"당신의 마지막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말은 저자가 해부학 실습을 하고 나서 자신이 해부한 주검에게 한 인사말이다. 저자는 머리부터 손끝, 발끝까지 한 구석도 놓치지 않고 갈기갈기 파헤친 죽은 육신에게 머리 숙여 감사한다.

좋은 의사가 되어 수백, 수천 명의 병을 고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의대에 들어간 저자에게 이름도 주소도 알 수 없는 이 주검은 곧 스승이다. 가장 훌륭한 스승인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스승 유의태는 제자 허준에게 자신이 죽은 후의 육신을 들여다보도록 허락한다. 이것은 허준이 명의가 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로 소개된다. (사실 유의태는 허준보다 150년가량 후대의 사람이다.)

실제로 의대 출신들은 자신이 의대에서 해부한 주검이 거의 일생 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것도 익명의 주검이.

다시 김수환 추기경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분도 익명으로 육신의 일부를 아픈 자에게 남겼고, 그 덕분에 두 사람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살아서 여유있게 선행을 베풀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죽어서 어차피 한 줌 흙이 될 진대, 영혼이 떠난 육신의 일부나 전체로 선행을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면서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예부터 <신체발부수지부모불감훼손효지시야>라고 해서 말로만 몸을 아끼고 실제로는 온갖 만행을 저질러 온 것이 우리내 몸의 현실이다. 죽어서도 몸을 아끼는 것이 효도이자 자기사랑의 표현일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 쓸모없는 미련이자 집착임을 알 수 있다.

동물도 죽어서 새끼나 다른 동물에게 몸을 내준다. 미생물도 접근하지 못하게 방부제를 뿌리고 대리석으로 사방을 꽁꽁 닫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살아서는 움직이고 죽어서는 나눠지고 썩는 것이 순리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천국 갈 욕심을 부리기 전에 먼저 고려해 볼 일이다.

<보살피고 고통을 덜어주고 함께 있어 주는, 그런 걱정해 줄 영광을 가지는 것은 친구에게뿐 아니라 의사에게도 가장 중요한 역할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해낼 수 있을 때 의사들은 진정한 치유력을 갖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별이 서툴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서툰 것은 그저 당연한 것일까. 저자는 그 이별이 서툴지 않을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이 말이 그 해답이다. 의사로서 진정한 치유력을 갖는다면 이별이 서툴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최소한 서툰 감정을 최대한 덜어낼 수 있다.

떠나는 자나 떠나보내는 자 모두 서로에게 고마워할 수 있다면 이별은 서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두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이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한마디는 "고맙습니다."였다. 그가 살아 있을 적에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은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에게 빚을 졌다. 그런데 그가 떠나면서 남겨지는 모든 이에게 "고맙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생전에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만한 뭔가를 그에게 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후회가 마음속에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그를 만나서 진정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의 축복된 영면을 빌어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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