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느 시대의 도자기를 굽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느 시대의 도자기를 굽고 있습니까
  • 글 배오직 / 사진 유경상
  • 승인 2009.03.04 11: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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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ay - 도자기의 부흥을 꿈꾸는 김창호씨

우리나라는 많은 것을 일구어 낸 민족이나 그 만큼 잃어버리고 지키지 못한 유물들 또한 무척이나 많다. 특히 도자기라는 유ㆍ 무형의 자산은 거의 이웃나라인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 우리는 그 옛것들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도자기 공예가 김창호(41세ㆍ 도연공방)씨를 만났다.

▲  일본의 약탈로 빼앗긴 도자기의 부흥을 20년째 꿈꾸고 있는 도연요 김창호씨 

한국 도자기의 근간이 되었던 관요과 민요

조선시대에는 국가사업으로써 궁이나 관청에서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곳인 관요와 일반 백성들을 위한 곳인 민요가 있었다고 한다.

“도제조내의 관리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솜씨 좋은 민요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선발이 돼 관요로 노역 같은 생활을 하면서 일을 했답니다. 한 400여 명 정도가 같이 생활했다고 해요. 아마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도자기 기술은 힘들지 않았겠어요?”

지금은 작가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지만 그 당시 노역과 같은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했던 장인들이었다.

“왜란 전(前) 일본이 만들 수 있는 수준은 낮은 온도에서 구울 수 있는 옹기 수준의 푸석한 도기 정도였죠. 단단한 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수입을 해서 썼습니다.”

일본은 전쟁 중 장인들을 납치해 갔다. 잡아간 장인들을 회유해 후쿠오카 지방에서 정착케 했고 좋은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

일본 아리타 지방의 좋은 흙을 찾은 장인들과 그 후손들은 이후 400년 이상 14, 15대에 걸쳐 활동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 도자기의 기반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 이후에 외국에서 공부를 한 대학출신의 의식 있는 분들이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60-70년대 가장 부흥했었지만, 안타깝게도 88년 올림픽을 정점으로 다시 사양길로 접어들었어요.”

▲ 찾는 이들에게 차를 따라 주고 있다.

20년 넘게 도자기를 굽고 있는 김창호 씨는 그의 말대로라면 ‘정점’에서 ‘사양’길로 접어든 시기에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던 그는 “국내에선 기술적인 부분들이 많이 끊어진 탓도 있었겠지만 도자기의 성형과 화원(그림)까지 각자 분야가 따로 있었죠. 그러던 것이 지금은 그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작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럼 일본에서는 도자기 기술이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에 대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  벗들과 함께 하는 찻 맛 또한 일품이다.

“일본에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미 상당부분 일본화 되었고 역사라는 게 상대적이잖아요. 재가공해서 유럽에다 수출까지 하고 있으니 그들 입장에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의 합성어다. 분류를 하자면 4가지 정도로 구분되는데 그 옛날 요즘과 같은 가마를 만들지 못해 노천에서 흙을 빗어 구웠던 토기와 석기가 있고, 옹기처럼 공기의 흐름이 비교적 자유로운 도기와 높은 열로 구워내야 하는 자기로 나누어진다.

“지금은 유약을 만들어 내지만 원래 윤이 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가마를 만들어 고열로 굽다가 나무가 타고 남은 재가 녹아내려 저절로 반짝이는 거예요. 그 것을 거꾸로 만들어낸 것이 유약이라 할 수 있죠.”

수요 공급의 불균형 속 희망 찾기

일본에서는 어느 가정이나 식당에서도 자기로 만든 그릇으로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값싼 스테인리스강과 공장에서 대량으로 구워내는 그릇을 많이 사용하기에 수요도 없을 뿐 아니라 고가로 인식되어 있어 어려움이 이중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도자기만을 전공하는 학과도 거의 없죠. 그래서 저도 대학원을 재료공학을 공부하며 도자기에 들어갈 수 있는 기능성에 주목하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음식을 숙성하거나 할 때 적당한 그릇으로 보입니다. 특히 발효 음식이 많은 우리 식생활에서는 더없이 좋은 그릇이죠. 던져도 절대로 깨지지 않는 그릇은 우리들의 심성과도 맞지 않은 것 같아요.”

그는 은 나노 기술을 도자기에 접목하여 항균작용과 함께 자기의 단점인 잘 깨지는 점을 보완한 그릇을 만들어 희망을 이어가겠노라 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자 어깨너머 긴 말총머리가 수줍은 듯 보였다. 머리를 감지 못했다며 뽀샵(?)을 부탁하며 웃었다.

서양화가인 고모의 권유로 맺은 도자기 인생

▲ 2006년 4월 (사)한국전업도예가협회 초대전으로 열린 '봄, 봄빛 그릇전'. 참여작가는 김창호를 포함해 6명이었다.

김창호 씨의 도자기 인생은 집안의 영향이 컸다. 집안에는 예술 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특히 고모의 권유로 경기도 이천에 계신 어느 선생님을 무작정 찾아 갔다.

적지 않은 나이에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이 일이 혹 소모적으로 될까봐 그의 스승은 처음부터 만류를 했었다. 2년 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또 다른 스승을 만나 도자기 굽는 일을 더 배우게 된다.

주위의 시선이 작가라는 삶으로 못이 박혀 있어 그것이 부담으로 동시에 다가온다는 그는 작품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쓰임새가 있는 실생활 물건을 만드는 장르이기 때문에 예술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내가 만든 물건을 잘 쓰다가 자연스레 인정을 받으면 그것이 곧 작품이 되는 거죠. 출생신고 할 때부터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아직 그렇습니다.”

김창호 씨는 대량생산을 통한 도자기의 대중화와 소량유통을 통한 작품 만들기, 그리고 일생에 하나 만들까 하는 극소량의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다.

“제가 사실 그것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는데요. ‘열팽창계수’ 라고 하는데 도자기 속의 흙과 유약의 계수가 다르니 굉장히 작은 수치지만 그 차이로 균열이 생깁니다.”

▲ 2008년 6월 안동시민회관에서 열린 '도자기 주전자 전'

그릇이라는 것이 음식을 담아 먹는 것이어서 금이 가게 되면 아무래도 위생에는 안 좋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찻사발 같이 늘 정성들여 닦아 내며 사용하는 그릇은 크게 문제 될 건 없고 오히려 찻물이 배어 미관상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가끔 물어보죠. 당신은 어느 시대의 도자기를 굽고 있냐고요.”

언젠가는 옛 대가들의 작품을 꼭 재현하고 싶다. 궁극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1300년대 기법의 모방과 동시에 2000년대의 기능성에 중점을 둔 위생적인 그릇을 만들어 장인으로써 직무유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전했다.

어느 덧 14년 경력가가 된 아내

“96년에 집사람을 만났습니다. 안동 여성회관에서 다도 교육생으로 만났는데 너무 예뻐서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온 옷이며 신발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지요.”

9개월 후 처음 안동에서 가마를 만들고 불을 넣는데 구경 온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지금의 아내인 권숙희 씨다. 그러던 중 공방에서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했고 도자기를 배우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구애 방법인 ‘서동요 급 아류’ 들을 생산해 내며 처가의 승낙을 어렵게 얻었다.

“아내가 존재감 없이 사는 것이 안타까웠고 2005년 시내에 공방을 만들었습니다. 김창호 아내 보다는 본인 이름으로 살고 싶어 했었죠.”

아내 역시 14년 간 도자기를 만들어 왔다. 아내 이름으로 올해는 꼭 개인전을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사주는 분과 사가는 분

온혜를 지나 가송 분교에서 살던 시절 봉화 교육청의 체험장을 맡아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을 지도 했었다. 그렇지만 점점 일이 알려지다 보니 체험자들의 수가 늘어나 불편함을 느낀 그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 인터뷰를 마치고 전시실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도자기를 설명해 주고 있다. 

1년에 서너 차례 가마에 불을 넣는데 도자기를 굽는 불은 불완전 연소를 해야 한다. 마을 주민들께 피해가 갈까봐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마을 어른들이 이해를 해 주고 있다.

“가스 값이 많이 올라 체험 비용을 조금 올릴까 고민 중입니다.”

단체에서 개별 작품을 만들어 오면 통상 한 달이라는 기간이 필요하다. 대형 가스 가마에 각양각색의 그릇들이 채워지는데 필요한 시간인데 아이들은 7천원 성인들은 1만원 정도를 받는다.

보통 개인당 한 개 정도만 구워주는데 이유는 여러 개를 만들어 오라고 하면 정성스럽게 만들어 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작품을 똑같이 잘 만드느냐를 훈련하는 과정으로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한두 개를 만들더라도 각기 다른 생각을 담고 싶다고 한다.

서울 지역보다는 지방에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 먼저 지역에서 인정받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다. 작가들의 적당한 텐션(긴장감)과 전문적인 큐레이터들이 힘을 모아 이젠 지방에서도 좋은 작품들을 전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 초심을 지키며 좋은 작품으로 화답하고 싶다.
어쩌면 불모지이자 기회의 땅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에게 바라는 점을 물었다.

“처음 본 도자기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두루 봐야죠. 특히 충동구매 하듯 대하지 말라고 권유합니다. 그러면 대개 잘 사용하지 않게 되니까요.”

사주는 분들과 몇날 며칠을 고민 끝에 사가는 분들이 있다고 했다. 이 둘의 차이는 아마도 그릇을 대하는 마음의 차이가 아닐까 라고 말하는 공예가 김창호 씨.

초기 작품들을 회수해서 부끄러움을 몸으로 느끼고 싶다는 그는 다시 처음이라는 초심으로 돌아가 그릇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에게 더 좋은 작품으로 화답하고 싶단다. 그의 장인의 기질을 읽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향긋한 차향을 떠올리며 무거운 짐만을 그에게 지운 채 침묵하는 우리의 카르텔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현재 안동시 이천동 도연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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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사 2009-03-13 12:22:41
항상 바른길로 가시려는 도연님 힘들더라도 옆길로 새지 마시고
혹시 꼭 옆길로 갈일이 생기면 부인을 대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