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경쟁의 근원, 일자리 절대부족탓
과열경쟁의 근원, 일자리 절대부족탓
  • 김대호
  • 승인 2009.03.1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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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를 양극화시키면 사회의 양극화는 완화된다

과열 경쟁의 근원

결론만 먼저 말하면, 한국의 거의 모든 과열 경쟁의 원천은 기본적으로 괜찮은 일자리의 절대 부족 탓이다. 문제는 이 현상이 상당 부분 구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정상적인 일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의 처우(임금, 고용)가 한국의 생산력(평균소득) 수준에 비추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두 사람이 받아가야 할 몫을 한 사람이 받아가거나, 두 사람이 할 일을 한 사람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평가보상 체계가 기득권자, 공급자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업자,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비전문직, 청년세대, 자격증 미소지자, 민간부문 등 상대적 비기득권자가 과도한 배제와 차별을 받고, 소비자들이 과도한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엄청난 사교육 열풍, 고시/공시 열풍, 유학 열풍, 입시위주 교육, 지나치게 높은 대학진학률, 세계 최고속의 저출산고령화, 영세자영업 과잉, 비정규직 관련 분규의 진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해결책은 한 사람의 몫을 두 사람이 나눠가지는 것도 아니며, 한 사람이 할 일을 두 사람이 나눠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괜찮은 일자리에만은 엄격하고 합리적인 평가보상 체계를 들이대어 이들이 많이 누리는 만큼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이 능력, 노력, 성과에 상응하는 처우를 받는다면, 그래서 양극화를 걱정할 정도가 되면, 사회 전체의 양극화는 훨씬 개선되고, 물질적 문화적으로도 훨씬 풍요롭고 건전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면 한국의 고질적인 불합리한 격차나 건전하지 못한 경쟁 열기가 최소한 OECD 평균 수준 정도로는 개선되지 않을까 한다.

한국의 괜찮은 일자리의 전형, 교육 부문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한국의 괜찮은 일자리의 특징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교육 부문이다. 특히 교사의 처우(임금, 고용 등) 수준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부문과 전문직 처우의 바로미터이다. 사실 임금 결정의 원리상 국공립 교사의 임금은 공무원, 공기업 직원, 보건의료복지 부문에 종사하는 전문직의 임금과 따로 놀 수가 없다. 비경쟁 공공부문의 임금은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인재 배분 전략을 반영한 정치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 공립 교사들의 임금은 공공부문 종사자들과 전문직의 전반적인 임금 수준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교사의 경우 매년 발표되는 [OECD 교육지표]에 의해 그 근로조건이 매우 상세하게 집계되어 발표된다. 게다가 교사의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의 성격이 매우 비슷하다. [2007년 OECD 교육지표]는 회원국 30개국, 비회원국 6개국 등 총 36개국의 교육 관련 26개 지표가 상세하게 비교되어 있다. 그 중 교사의 급여 부분만 살펴보자.

2005년 현재 15년 경력의 한국 국공립 초․중․고 교사는 1인당GDP(구매력을 감안한 GDP=PPP; 1$=769.01원) 대비 2.33~2.34배를 받는다. 그러나 많은 진보개혁 성향의 사람들이 내심 모델로 삼고 있는 북유럽 사민주의 복지국가들인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의 경우는 국공립 중학교의 15년 경력의 교사는 1인당 GDP의 0.98배, 1.14배, 1.23배, 0.74배를 받는다. 초등교사는 이보다 다소 낮고, 고등학교 교사는 다소 높다. 물론 이들 나라는 전반적으로 임금․소득의 격차가 크지 않고, 여성취업률도 높고, 비경쟁부문으로 분류된 공공부문의 임금이 정치적․철학적 고려에 의해 낮게 유지되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 임금이 이 나라에서 유달리 낮은 것은 아닐 것이다.

부문, 직업, 직능, 기업 간 임금, 고용의 평등도가 높으면, 좋은 직업, 직능, 기업을 둘러싼 경쟁이 구조적으로 치열할 수가 없다. 입시위주 교육이나 사교육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

어쨌든 다른 선진국들이라고 해서 교사의 임금이 스웨덴 등에 비해 많이 높은 것은 아니다. 전기 중등(중학) 교육의 15년 경력 교사의 경우 영국은 1.33배, 미국은 0.98배, 프랑스는 1.11배, 일본은 1.56배, OECD평균은 1.30배 수준이다.

<표1> 1인당GDP(PPP환산) 대비 15년 경력 국공립 교사 급여 비율(2005년 기준)

출처: 2007년 OECD 교육지표


[그림 1] GDP(PPP)대비 주요국 교원임금 비교(2005년)

PPP로 환산한 임금의 절대 액수는 한국의 중학교 교사 초임은 30,058 달러이다. 스웨덴은 26,756달러, 덴마크는 34,517달러, 핀란드는 32,273달러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OECD평균은 29,772달러이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는 1인당 명목 소득이 한국의 2배가 넘는다.

15년 경력의 중학교 교사의 경우는 한국은 51,516달러지만,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는 31,585달러, 38,911달러, 38,159달러로 한국 보다 훨씬 낮다. OECD평균은 40,322달러이다. 이로부터 한국은 근무 연수에 따라 임금 수준은 가파르게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스웨덴, 덴마크 등은 너무 완만하게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사들 국제 교류에 참여해 본 사람(주로 장기근속 교사, 교감, 교장들)은 한국 교사의 임금 수준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란다.

(2006년 기준 한국 1인당 명목 GDP는 18,391달러, 스웨덴은 42,382달러, 덴마크는 50,965달러, 핀란드는 40,196달러, 미국은 44,190달러, 영국은 39,213달러, 일본은 34,188달러, 독일은 32,520달러, 프랑스는 35,404달러, 네덜란드는 40,571달러이다. PPP로 따지면 한국은 2만3천~2만4천 달러 가량 되고 이들 나라들은 명목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기에 격차는 다소 줄어든다.)

초, 중, 고 교사 간 임금 체계를 보면 한국은 15년 경력 국공립학교 교사는 초, 중, 고가 51,516달러 ~ 51,641달러로 거의 동일하다. 이런 나라는 일본, 그리스,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다. 그런데 사회 전반적으로 높은 평등도를 자랑하는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의 경우 상급 학교로 갈수록 교원 임금 수준이 높아진다.

<표 2> PPP환산 국공립 초.중.고 교사 급여 비율(2005년기준)

물론 학급당 학생 수는 한국이 많다. 하지만 월등히 많은 것은 아니다. 국공립 중학교의 경우 한국은 36명인데, 이웃 일본은 33.4, 미국은 24.9명, 영국은 24.3명, 독일은 24.7명 수준이다. OECD 평균은 23.8명이다.

교원 1인당 학생 수는 당연히 한국이 많다. 국공립 중학교의 경우 한국은 20.8명이나 미국은 15.1명, 영국은 17.0명, 독일은 15.5명, 일본은 15.1명, OECD 평균은 13.7명이다.

<표 3> 교육단계별 교원 1인당 학생 수(2005)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원은 수업 담당 교원이다. 따라서 교장, 교감, 상담교사 등 관리직 교원은 제외 되어 있다. 한국은 대부분의 OECD 국가에 비해서 상담교사나 보조교사가 적고, 전문 사무행정 직원이 할 일을 수업 담당 교사가 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총 노동시간은 길며, 교사가 가진 부담감은 1인당 학생 수보다 더 높다. 그러나 교사에 대한 평가보상 체계가 왜곡되어 있으면, 다시 말해 사무행정 잘하는 교사가 교감, 교장으로 먼저 올라가는 체계로 되어 있으면 1인당 학생수가 10명이든, 20명이든, 교사들의 노동시간이 1.2배든 1.5배든 학업 성취도 관리는 상대적으로 소홀 할 수밖에 없다.

교사들의 임금 수준은 여성취업률(부부 맞벌이의 일반화 여부), 노동시간, 문화적 전통(유교적 전통), 교원노조의 영향력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해도 1인당 국민소득을 감안할 때 한국 교사의 임금은 국제 수준에 비해서 매우 높고, 초․중․고의 격차는 비교적 적고, 근무 연수에 따라 임금 수준은 가파르게 올라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한국의 교사들은 높은 임금 외에도 노령연금에서도 상당한 특혜가 있고, 고용보장과 진입장벽(자격증)도 그 어떤 나라보다 튼튼하다. 한국 청소년들에게 교사라는 직업의 인기가 고공행진을 하고, 결혼시장에서 교사에 대한 선호도가 최고인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보상(승진) 체계는 교사로 하여금 수업이 아니라 사무행정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도록 함으로서, 교사들의 자질과 처우에 비해 형편없는 교육성과를 내도록 하며, 이 빈틈을 사교육이 메우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의 교육 현실을 요약하면 최고의 인력을 뽑아서, 최고의 대우를 하고, 그러면서도 가치 전도된 평가보상체계를 통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면서 엉뚱한 일에 매진하게 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비교 대상이 금융 공기업, 현대자동차 조합원, 공무원 등 (교사들이 볼 때) 별로 하는 일 없이 엄청나게 많이 누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교사들의 지나치게 높고 안정적인 임금고용 수준 때문에 학생들의 다양한 수요에 부응하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교사를 충분히 채용하지 못하여, 교사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임시교사는 극심한 차별로 신음하고, 학생과 학부모는 부실한 교육에 분통을 터뜨린다. 교사들은 학교 운영상(내적) 불합리성과 상대 비교를 통해 느끼는(외적) 불공평성 때문에 불만은 들끓는다. 이는 학생, 학부모의 눈쌀을 지푸리게 하는, 그들만의 노동조합 활동을 밀고 가는 동력이다.

이런 류의 일은 교사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무원, 공기업, 전문직, 대기업 조직노동의 세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제 임금 수준만 가지고 이들 괜찮은 일자리들의 문제를 살펴보자.

공무원과 다른 전문직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평균 근속년수와 연봉의 국제적 수준을 알려주는 통계는 없다. 그러나 공공기관 정보공개시스템(www.alio.go.kr)에 가면 298개 공기업 의 2006년 현재 평균 근속년수와 평균 임금액 통계를 볼 수가 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금융감독원은 평균 근속년수 13.5년에 평균 임금은 1인당 명목 GDP(2006년 현재 1,775만5천원)의 4.5배(7,946만원)로 나와 있다. 사양산업의 대표 격인 대한석탄공사는 17.6년에 1.9배 수준으로 거의 바닥이다. 하지만 웬만한 공기업의 평균 임금액은 1인당 GDP의 2.4(4,200만원)~3.4배(5,960만원) 수준이다. 다른 선진국의 경우는 공무원과 공기업의 임금 수준은 교사들과 비슷하기 마련이다.

<표 4> 주요 복지전달 공공기관의 평균 임금액(2006)

출처: www.alio.go.kr

OECD Health Data(2005)에 의하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의 월급쟁이 전문의의 임금은 1인당 GDP(PPP)의 2.52배, 2.89배, 2.65배이고, 간호사의 임금은 덴마크가 1.34, 핀란드가 1이다. 스웨덴, 덴마크의 의사 임금은 한국으로 치면 연봉 4,500~5,000만 원 수준인데, 이는 한국 공공기관(국민연금관리공단, 건강보험관리공단 등) 직원들의 평균 임금 수준이다. 한국은 의사 임금에 관한 공식 통계는 없다. 그런데 의사 임금이 중간수준이라고 알려진 지방 국공립병원의 임금은 대체로 1인당 명목 GDP의 4~6배 내외이다. 물론 의사 1인당 진료하는 환자 수는 많고, 노동시간은 매우 길 수밖에 없다.

한편 자격증과 노조에 의한 프리미엄(경제적 지대)이 별로 없어 시장원리에 거의 노출된 중소 개인병원 간호사의 평균임금은 선진국 수준과 비슷한 1.5배 이하이다. 의사의 임금은 한국의 변호사, 정규직 교수 등 전문직의 임금과 따로 놀 수가 없다.

북유럽 국가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교사, 공무원, 의사, 간호사 등의 임금 수준이 한국처럼 높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고용확대가 쉽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한국에서는 한 사람이 할 일을 북유럽 국가에서는 두 사람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사, 의사, 간호사를 포함한 사회서비스 부문이 총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3년 현재 노르웨이 34.2%, 덴마크 31.3%, 핀란드 27.3%, OECD 평균은 21.7%를 차지하며, 한국은 12.6%에 불과하다. 한국은 투입 재정도 적을 뿐 아니라, 주요 사회서비스 종사자의 처우 수준도 높고 경직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GDP 기준으로 따질 때 한국은 미국에 비해 4년제 대학 전임교수의 임금이 상당히 높다. 반면 시간강사의 임금은 극도로 낮다. 미국 교육통계센터(NCES)가 2006년 1월 5일 발표한 통계(미국 교육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6,539개 기관과 일반대학, 2년제 대학과 평생교육기관의 4년제 대학교수 총 99만 7,916명 통계)에 따르면 정교수의 평균연봉은 87,634달러로 2005년 미국 1인당 명목 GDP 41,873달러의 2.09배, 부교수는 1.5배(63,567달러), 조교수는 1.28배(53,481달러), 전임강사 1.1배(46,238달러), 시간강사 1.06배(44,385달러)였다. 4년제 공립대의 경우 남성 정교수의 연봉은 2.18배(91,102달러), 여성 정교수는 1.95배(81,719달러)였다(한국대학신문, 2006.1.16).

한국 대학교수의 평균임금 통계는 없지만, 1인당 GDP로 따지든 PPP로 따지든 전임교수(특히 인문․사회학)의 평균임금은 훨씬 높고, 시간강사의 임금은 훨씬 낮으며, 서울 소재 유명 대학의 전임교수의 처우는 대단히 높고(달러 표시 명목 임금 자체가 한국이 높은 경우도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지방 소재 무명 대학의 전임교수는 그 실력에 관계없이 대단히 낮다는 것이 정설이다. 시장원리가 어느 정도 작동하는 시간강사의 처우는 대학별 격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전임교수의 처우 격차는 엄청나게 크다. 박거용 교수노조위원장의 조사에 따르면 국립대학 전임교원 연봉은 최고액이 1억961만원, 최저액은 1천393만원으로 약 8배, 사립대학은 최고액이 1억8천547만원, 최저액이 1천88만원으로 그 차이가 무려 17배에 달했다. 무려 17배가 차이가 나는 사립대학 전임교원 연봉은 시장이 작동한 소치라고 볼 수가 없다.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문제도 그 격차가 큰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역시 한국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처럼 시장수요, 성과, 직무에 정확하게 연동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한 쪽은 마치 귀족이 된 것처럼 교육, 연구, 사회공헌 실적에 상관없이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와서 높고 안정적인 처우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줌으로서 나태해지고, 다른 한쪽은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강사 신세를 피할 수 없거나, 학생 자체가 오지 않아서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전임교수에 대한 재신임이 느슨하니 중고(Recycling)시장 혹은 패자부활전이 활성화되지 않고, 따라서 신규진입자, 청년세대가 불리한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대학의 전임교수와 시간강사의 격차의 불합리성도, 전임교수 내에서의 격차의 불합리성도 과거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그것과 견줄 수 있다. 또한 대학이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요구에 적확하게 부응하지 못하는 지식과 졸업생을 양산하는 현상도 사서삼경 위주의 중국 고전 교양에 치중하던 조선시대와 견줄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의 정치학, 사회학 등 인문사회학은 그 평가보상체계(교수임용체계, 승진체계 등)가 인문사회학자들로 하여금 한국 현실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도록 하지 않는다. 전임교수의 전반적인 고용-임금의 경직성으로 인해 사회와 시장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도 없다. 당연히 새로운 학문과 발상을 가진 젊은 학자를 발탁해 쓰기도 곤란하다. 결국 교수 사회 역시 강력한 노동조합이 지배하는 대기업, 공기업처럼 종사자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상벌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전임교수에 대한 과도한 신분 보장은 정권과 재단의 횡포를 막아내려는 민주화, 자유화 운동의 성과로서 간단히 폄하할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선진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해야 할 대상임이 명백하고, 지금이 개혁에 착수해야 할 시기이다. 당연히 평가보상의 주체가 밀실에서 전횡을 일삼는 사학재단과 정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노블레스들을 규율하는 상벌체계

지금 시대가 사람의 창의와 열정 혹은 인재의 합리적 배분이 국가, 사회, 기업의 흥망을 가르는 지식기반 시대가 맞는다면, 최고 수준의 잠재력을 가진 청년 인재들의 흐름과 이들의 능력 개발에 큰 영향을 주는 사회적 평가보상(상벌)체계의 중요성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의 위기는 자질이 뛰어나거나 힘 있는 존재들 (정규직, 공공부문, 전문직, 재벌 및 대기업 등)이 그 기여 정도에 비해 경제적 잉여를 너무 많이 가져가는 현실에서 오는 측면이 있다. 한마디로 사회 전체적인 생산력 수준은 안 되는데 자신들만 먼저 선진국을 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위기의 근원은 이들, 자질이 뛰어나거나 힘있는 존재들로 하여금 그 높은 처우에 상응하는 만큼 성과를 내도록 강제하지 않는 후진적 평가보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다양한 층위에 걸쳐 경쟁 규칙과 평가보상(상벌)체계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입시, 고시, 지방선거 등이 보여주듯이 승자를 가리는 방식 자체가 기득권자의 농간이 짙게 배여 있다. 대체로 승자에게 너무 크고 영속적인 이익이 주어지고, 감시. 감독은 허술하다. 돈이든, 권력(규제권, 재정 할당권)이든, 단결투쟁력이든, 독점권이 튼실한 자격증이든, 유력자와 연고든, 매체든, 도심요지 부동산이든 뭐든 ‘한 칼’이 있는 갑(甲)적 존재들의 처우는 국제기준으로 볼 때 매우 높고 안정적이지만 ‘한 칼’ 없이 시장 경쟁에 내팽개쳐진 을(乙)적 존재들의 처우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신분상승의 사다리 아래에서는 경쟁은 치열하지만 일단 사다리를 올라가고 나면 마치 귀족이 된 것처럼 경쟁은 너무 적다. 사다리 아래 혹은 성 밖에서는 너무 가혹하고 과도한 시장이 존재하지만, 사다리 위 혹은 성 안에서는 너무 온화하고 과소하고 불합리한 시장이 존재한다. 단적으로 학생에게는 너무 치열하고 집중적인 경쟁이 요구되고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에 집중되어 있다- 교사와 전임교수에게는 너무 적은 경쟁이 요구된다. 승자 재신임전에 인색한만큼 패자부활전이 원활할 수가 없고, 신진 세력의 도전 기회가 풍부할 수가 없다. 물론 경쟁 기회 조건의 평등 문제나 반칙. 변칙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

이 모든 것은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현재 기득권을 거머쥔 유능한(?) 사람들의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중심으로 경쟁 방식과 평가보상 방식이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분 상승의 사다리 아래서는 근면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용케 사다리를 올라가서 정말로 권능을 제대로 행사해야 할 위치에 오르게 되면 오히려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모순과 부조리의 하나이다.

이는 한국의 제반 주류 정치, 사회세력의 성과이자 한계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화 운동과 민중운동은 구보수 기득권층의 불합리한 기득권을 제대로 조정, 퇴출시키지 못하고, 신 기득권층을 등장시켰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나 비기득권층 입장에서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어버렸다. 참여정부는 신, 구기득권의 패악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시기에 집권했지만 이 강고한 두 기득권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였다. 비기득권자들의 도전 기회가 풍부한 역동적인 한국을 만들지 못하였다. 장거리 경주에 나선 단거리 선수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노블레스를 양극화시키면 사회 전체의 양극화는 완화된다

한국의 불합리한 평가보상체계의 문제는 사회적 약자들이 총단결해서 사회적 강자와 노블레스의 몫을 뺏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강자와 노블레스들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높은 권리, 이익, 혜택에 상응하는 빼어난 성과를 창출하도록 압박해야 해결된다. 물론 이들에 대한 압박은 단지 설득과 호소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위를 규율하는 합리적인 평가보상 체계로 압박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보편화된 상식으로 압박해야 한다.

▲ 김대호 소장
만약 한국의 노블레스들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나 시장의 요구에 치열하게 응답하도록 시장 구조와 평가보상 체계를 개혁한다면, 그래서 이들이 승자재신임전과 패자부활전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환경에 놓인다면, 한마디로 이들이 성과주의, 시장주의로 인해 양극화 된다고 비명을 지른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회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들은 세계적인 기술이나 상품도 만들지만, 합리적인 상벌체계와 리더십도 만들며, 양극화가 자신들의 문제로 된다면, 양극화가 극심해 지지 않도록 게임 규칙을 설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부와 가치를 나누는 것은 단순히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나누는 방식에 따라, 즉 평가보상 체계에 따라 부와 가치 전체가 지속적으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이 능력, 노력, 성과에 따라 양극화 되면 사회 전체의 양극화는 훨씬 완화되고, 사회는 훨씬 풍요롭고 정의로워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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