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의 노동조직이 세계적 기형인가?
왜 한국의 노동조직이 세계적 기형인가?
  • 김대호
  • 승인 2009.04.0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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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의 정치통계와 해설(7)

[정치통계 7] 왜 한국의 조직노동이 세계적 기형인가?

아래 표는 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부문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을 비교한 표이다. 대기업만 보면, 2002년 이후부터는 한국이 대략 8%대로 가장 높고, 미국이 6%대로 그 다음, 일본은 4~5% 대로 가장 낮다.

<표 1>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대기업 영업이익률 추이

그러나 중소기업만 놓고 보면 2005년 현재 미국이 6%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한국(4.3%), 일본(2.7%) 순이다. 문제는 한국은 이익률이 경향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표 2>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중소기업 영업이익률 추이

문제는 한국의 경우, 미국, 일본과 달리 이 격차가 경향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극화 현상은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다.

<표 3>한국, 미국, 일본의 제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영업이익률 격차 추이 단위( %p)


<이 통계는 산업연구원이 발간하는 ‘e-kiet 제331호’(2007. 3. 13)로부터 재인용하였다. 중소기업 분류 기준은 나라 별로 상이한데, 한국은 상시종업원 300인 미만 사업체를, 일본 은 자본금 1억엔 이하 업체를, 미국은 총자산 2,500만 달러 이하 업체를 지칭한다. 한국의 중소기업 관련 자료는 중소기업중앙회의 ‘중소기업경영지표’(중소기업)를, 대기업 관련 자료는 한국은행의 ‘기업경영분석’자료를 이용하였고, 일본은 ‘법인기업통계’를, 미국은 ‘Census Bureau’를 이용하였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만 놓고 보면 한국의 (300인 이상) 대기업은 종업원에 대한 처우 개선 여력이 더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정당한가? 전체 노동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06년 8월 현재, 300인 이상 사업체 정규직은 총 147만 명으로 전체 근로자수 1,535만 명의 9.6%이며 총 취업자 2,343만 명의 6.3%이다. 300인 이상 사업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임시, 일용직)은 37만4천명인데 이들의 처우는 기업 경영 성과와도, 노조의 투쟁 성과와도 그리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지 않다.

2006년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원 수는 대략 156만 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10% 수준이다. 이는 1987년 이래 조직률이 가장 높았던 1989년의 20%의 절반 수준으로 총취업자 기준으로 보면 (임금근로자 비중이 총 취업자의 66.4%이기에) 6 ~ 7%에 불과하다. 이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매우 낮다고 알려진 미국(조직률 13%, 임노동자 비율 92.5%)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단체 협약도 한국과 미국은 조직률만큼만 적용되기에 조직노동의 처우는 높고, 미조직 노동의 처우는 낮은 편이다.

미국은 한국만큼 개인주의가 강하고 사회적 연대성이 취약하지만, 한국과 달리 고용, 임금 수준은 시장원리를 상당 정도 따르는 편이다. 따라서 미국은 기업 규모나 수익성에 따른 고용, 임금 수준의 격차가 다른 선진국 보다는 크지만, 한국 보다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한국은 사회적 연대성도 취약한데다가, 조직 노동에게는 시장원리가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경우 노조 조직률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협약적용률은 90%가 된다. 이는 프랑스의 힘 있는 조직노동이 전체 노동자와 기업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협약을 주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프랑스의 전반적인 임금격차는 한국 노동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작다. 노동시간도 짧고, 1인당 평균 소득을 감안하면 괜찮은 직장, 직업(대기업, 공공부문, 전문직 등)의 임금 수준 자체가 한국보다 많이 낮다. 거의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은 대기업, 공기업 중심의 조직노동은 기업의 수익성이 허용하는 자신의 노동의 양, 질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격)수준에 상관없이 끝없이 처우를 올린다. 노동시간 단축은 바라지만 임금 저하는 결사 반대한다. 고용 유연성이나 성과 직무급은 결사 반대한다. 당연히 조직노동의 관심사및 요구 수준과 대다수 미조직 노동, (청년)실업자, 영세자영업자의 그것은 너무나 다른다. 한국 조직노동은 그들 만의 이해와 요구를 쫒아서 그들 만의 길을 갈뿐이다. 한국의 노사분규 원인별 상세내역을 보아도 노동자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투쟁인 단체협약 관련 분규가 1999년에 44.9%, 2001년에 63.4%, 2003년에 77.8%, 2005년에 82.2%로 늘어났다.

그 결과 한국의 임금 수준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는 사업체 규모와 노조의 힘이 되었다.

단적으로 2008년 5월 27일 발표된 노동부 ‘사업체 근로실태 조사’(43만 9천명 대상 표본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같은 사업장의 나이, 학력, 근속년수 등이 같은 조건인 노동자 집단을 비교했을 때) 300인 이상 대기업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비해 시간당 임금총액이 31.8%가 높았고, 300인 미만에서는 12.2%가 높았다. 노조가 있는 기업에서는 정규직이 비정규직에 비해 32.6%가 높았고, 무노조 기업에서는 9.5%가 높았다. 규모 효과와 노조 효과는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을 포함한 직간접적 노동비용을 집계한, 월간 총 노동비용 조사에 따르면 10~29인 규모의 제조업의 월평균 노동비용은 263만 6천원이었으나, 300인 이상은 378만 3천원, 1,000인 이상은 541만 1천원으로 10~29인 규모의 205%이다. 1~9인 사업체 종사자(이들은 566만 명으로 임금근로자 1,535만 명의 37%이다)를 기준으로 하면 제조업에서 기업 규모별 격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일본은 동일한 통계는 없으나 학력별, 기업 규모별 초임을 조사한 통계는 있다. 日本經團聯이 2007年 9月 3日 발표한 “新規學卒者決定初任給調査” 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전반적으로 기업규모별 초임 차이가 거의 없지만, 다소나마 100인 미만 기업의 초임이 높게 나타난다. 이는 소기업의 태생적 불안정성에 대한 보상이기에 보다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기업 규모에 따른 격차가 크게 나타난다.

선진국의 경우, 특히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의 경우는 ‘동일노동-동일임금’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있어서 노동의 양, 질이 비슷하면 임금 수준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노동자들이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연공, 직무, 업종, 기업수익성에 따른 임금 격차가 적다. OECD 교육지표가 보여준 교사들의 임금 수준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한국은 자본의 이익이 허용하고, 노조의 힘이 허용하는 한 끝없이 올라간다. 그것도 성과, 직무와 상관없이 올라간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개별 기업의 이익이나 노동의 소속과 관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의 양, 질이 같으면 원칙적으로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북유럽 사민주의의 임금관은 마르크스주의의 임금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임금 체계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과도 무관하고, 한계생산력설을 채택한 주류 경제학의 임금관과도 무관하다. 1990년을 전후한 시기만 하더라도 한국 노동운동계에서는 자본의 적자타령=지불능력설에 대한 유력한 대항논리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임금관이었다. 임금 교섭현장에서는 ‘회사가 적자라서 임금을 충분히 올려줄 수 없다’는 논리를 피는 자본가에게, ‘당신은 돈이 없다고 1000원짜리 쌀을 500원에 달라고 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한국 대기업, 공기업 노조는 오히려 지불능력설에 기대어 끊임없는 처우개선을 요구한다. 이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적 핵심 중의 하나인 노동의 연대성이 무엇인지, 지속가능한 고용 창출과 안정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온데 간데없다. 무엇보다도 대기업, 공기업의 높은 이익 자체가 허술한 공정거래법을 활용하여, 분업과 협업의 발달에 따라 형성된 전후방 가치생산 사슬=하청, 협력업체에 대한 약탈의 산물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말할 것이다)

어쨌든 현재 한국과 같은 고용, 임금 체계에서는 작고 누추한 곳에서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해서 크고 넉넉한 회사로, 임시. 일용 허드레 일꾼에서 정규 핵심(지식)노동자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없다. 따라서 자회사 정규직 취업 약속을 거부하고, 신자유주의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몇 년에 걸쳐 ‘직접 고용 요구 투쟁’을 하는 KTX 여승무원들이 모범이다. 몇 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여 한방에 팔자를 고치려는 청년들이 모범이다.

한국과 같은 고용, 임금 체계에서는 한번 좋은 ‘소속’을 획득하여 팔자를 고친 사람들은 이제 그곳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그 곳을 나오면 자신의 노력, 능력으로 비슷한 처우를 받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 많은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자(1,752명) 중에서 몇 년의 해고기간 동안 대우자동차 보다 더 좋은 직장을 구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기업, 공기업의 조직노동이 누리는 근로조건과 그 밖의 노동의 근로조건의 격차가 클수록, 한마디로 안과 밖의 격차가 클수록 안과 밖의 순환은 어렵다. 안은 귀족 아닌 귀족이 되고, 밖은 천민 아닌 천민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사시 구조조정도 어렵다.

대기업, 공기업에서 구조조정 당하는 노동자는 몇 년에 걸쳐 정문 앞 농성을 할 이유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우자동차, 현대자동차, KTX 같은 '좋은 곳'의 고용확대는 어렵다. 꼭 필요하면 임시. 일용직을 뽑거나 외주화 시켜야 한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대기업 종사자 비율이 유달리 낮고, 대기업 생산직 평균연령은 높고, 외주하청 공정이 많고,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비중이 유달리 높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의 대기업, 공기업의 조직노동은 그 처우, 행태, 이념이 대단히 특이한 존재이다. 한마디로 세계적인 기형이다. 한국 조직노동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고용안정’과 ‘공공부문 유지=민영화반대’이다. 이것이 기득권을 지키는 확실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최대의 적은 ‘고용임금 유연화, 성과/직무(실력) 중심 임금체계, 민영화, 공급자 간의 경쟁 강화(소비자의 선택권, 심판권 강화)’ 등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시장주의 정책이다. 이들은 이를 신자유주의라며 극력 반대한다.

한편 대기업, 공기업 조직노동과 공공부문은 안정된 고용과 높은 임금, 퇴직금(퇴직금 누진제 포함), 자녀학비 지원, 주택 관련 저리 융자, 각종 재해보험 등을 통해 각종 ‘생애 위험’을 사업체 내에서 해소해 버리기에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 확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에서는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는 설사 구축한다고 해도 이들 고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코끼리 비스킷’이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에서 보듯이 대체로 불입한 돈에 비해 혜택이 적을 수밖에 없다.

사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조직노동의 처우가 이렇게 까지 월등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 확충에 소극적일 정도로 처우가 월등해져 버렸다. 전통적으로 한국 진보의 주력 부대인 조직노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국가차원의 보편적 복지제도 구축으로 향하기보다는, 고용안정, 유연화 반대, 민영화 반대, (공급자간)경쟁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로 향하게 된 것은 한국 특유의 조직노동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사상이념적 영향력을 빼놓고서 설명할 수가 없다.

김대호 소장
길게 조직노동을 비판한 것은, 한국의 다른 정치사회 세력들은 괜찮은데 유독 대기업, 공기업 조직노동만이 문제라서가 아니다. 대기업, 공기업 조직노동도 재정 약탈에 앞 다투어 나서는 지방토호들과 토건족만큼 문제라는 것이다. 허술한 공정거래법과 상법을 활용하여 하청 중소기업과 소액주주 약탈에 나서는 재벌, 대기업들처럼,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과 심판권을 제약하여 결과적으로 후진 품질의 교육서비스로 소비자를 약탈하는 사학재단과 교육기득권자처럼, 이를 방관하거나 대변하거나 결탁하는 무능하고 사악한 정치인과 관료처럼 조직노동도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수 국민들로부터 집권가능한 진보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으려면 이들 보수와 진보의 기득권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총 취업자의 90%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청년세대, 미래세대, 지식근로자, 벤처중소기업의 이해와 요구를 확고한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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