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노동의 이해와 요구를 떨어내지 않고 진보의 미래는 없다
조직노동의 이해와 요구를 떨어내지 않고 진보의 미래는 없다
  • 김대호
  • 승인 2009.03.2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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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의 정치통계와 해설 - 6

2500년 전 쯤 살았던 그리스의 현인 소크라테스가 남긴 수많은 메시지의 정수는 단연 ‘너 자신을 알라’, 즉 '지기'(知己)다. 자기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것이 진리와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2200년 전 쯤 살았던 중국의 현인 한비자(韓非子)는 모든 임금에게 충고할 단 한마디를 ‘지하(知下)‘로 집약하였다. ’아랫사람을 알라’는 것이다. 이들 현인들이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한국의 진보, 개혁, 민주세력에게 단 한마디의 충고를 한다면 무어라고 할까? 내 생각에는 ‘노동을 알라’가 아닐까 한다. 한마디로 '지노동'(知勞動) 내지 '지노조'(知勞組)이다. 노동과 노조는 오랫동안 진보의 존재이유이자, 희망이자, 든든한 무력이었다.

마르크스 이후 선진 문명국 진보 사상의 정수는 자본 및 인간의 탐욕을 극복하고, 시장을 안정적으로 관리,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 대업을 이룰 핵심부대로 간주된 존재가 바로 진보정당과 조직노동이었다. 외세에 강점당한 한반도에서는 여기에다가 외세를 극복하는 것이 추가되었다. 물론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진보 사상의 빼놓을 수 없는 기조는 자연 및 이웃과 더불어 조화롭고 평화롭게 사는 탈세속적 목가적 삶에 대한 지향일 것이다. 이는 지금 환경생태 운동이나 생명평화 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그렇게 강성해지지도 않았고, 최소한 수십 년 내에는 강성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북한과 조직노동이다. 반외세, 반 개방, 반자본, 반시장, 친조직노동(고용안정 등)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노동당은 외세와 자본이라는 한반도 진보의 오랜 숙원을 해결했다. 그러나 북한은 양심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처참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까지의 한국 진보의 활력은 북한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아는데서 왔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의 처참한 현실을 바로 알고, 북한적 철학(세계관, 인간관, 역사관, 가치관 등)과 시스템을 부정하는데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거칠지만 요란하게, 때론 주도적으로 수행한 세력은 아무래도 시대정신/뉴라이트 그룹과 진보신당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 노력이 주효해서라기 보다는 중국, 탈북자, 남북교류 등을 통해서 들어온 엄청나게 풍부한 북한 관련 정보가 진보의 오랜 경향성을 쓸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 개혁, 민주를 자처하는 정치사회 세력이 한국에서 또 한 번의 영광(집권)을 꿈꾼다면 북한에 대한 부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노동, 특히 조직노동의 이해와 요구에 대한 부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노동과 노조 자체의 구축, 극단적인 고용.임금 유연성 등 한마디로 자본 평천하를 지향하는 보수식의 부정이 아니다. 조직노동의 가치생산 생태계 파괴적인 경향을 제어하고, 노동의 창의와 열정을 최대로 살리는 변증법적 부정과 새로운 종합을 의미한다.

물론 이 정도의 언명을 부정하는 진보, 개혁, 민주 인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부정에는 노동, 특히 조직노동의 소박한(?) 꿈에 대한 부정이 포함된다. 한국의 생산력 수준, 경제사회 구조와 문화, 세계화/지식정보화/ 중국의 부상으로 집약되는 세계사적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안정된 고용, (주거, 의료, 교육, 노후, 문화생활을 보장하는) 그런대로 괜찮은 임금, 높은 조직률과 강력한 노동계급 정당, 노사정위원회나 노사공동결정제로 집약되는, 소박하다고 하지만 결코 소박하지 않은 꿈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2천만 노동이 살고, 진보가 산다는 것이다. 한국 진보, 개혁, 민주 세력이 총 취업자의 6~7% 수준인 150만 조직노동과 공공부문의 이해와 요구를 최우선적으로 대변하는 한, 사이비 보수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어이없는 일이 반복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945~53년 당시 일제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상당수, 진보 성향 인사의 절대다수는 북한 편에 섰다.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한국 진보, 개혁, 민주 인사들이 북한에 등을 돌린 것은 북한의 현실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970~80년대 민주화 투쟁을 가장 치열하게 벌렸던 청년학생들의 상당수가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청춘을 바쳐 노동의 조직화/의식화에 나섰지만, 이들의 각고의 노력의 결정체인 조직노동을 더 이상 진보, 개혁, 민주의 견인차로 간주하지 않는 것 역시 조직노동의 현실과 한계 때문이다.

진보가 북한을 넘어서는데 10여 년 이상의 시간과 엄청난 자료, 정보가 필요했던 것처럼, 한국의 조직노동과 이들의 이해와 요구를 가장 맛깔나게 포장한 이데올로기인 사민주의를 넘어서는데도 상당한 시간과 자료, 정보가 필요할지 모른다.

나의 ‘썰’이 혹세무민하는 교설(巧說)이 될 지, 한국 진보의 오랜 고정 관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의 뒤를 잇는 존재로 될 지를 가늠하는 것은 한국 노동의 현실과 조직노동의 변화 가능성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한국의 조직노동은 유럽, 일본, 미국, 호주 등지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노조는 우리의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던, 386의 청춘시절의 조직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엄청나게 많은 통계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몇 개만 살펴보자. 이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노동소득분배율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각종 노동(일자리) 문제에 대한 한국 조직노동의 요구를 단순화하면 자본이 자신의 몫을 더 나눠주고, 시장과 고용의 불안정성에 대한 부담도 더 떠 안고, 자본이 위험을 무릅쓰고 더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은 그 반대 일 것이다. 이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노동소득분배율과 기업의 손익을 살펴보자.

노동소득분배율은 보통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피용자=임금근로자 보수)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은행식 계산 방식은 ‘피용자 보수’를 분자로 하고, ‘피용자 보수+기업 및 재산소득’을 분모로 하여 나눈 것이다. (한국은행 계산식에서는 전체 국민소득이 분모가 아니다) 기업 및 재산소득은 영업잉여로도 불리는데 이윤, 이자, 배당, 임대료, 자영업자의 소득 등이 주요하게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소득분배율은 총취업자중 임금근로자(피용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노동의 가격이 자본의 가격보다 높을수록, 산업이 노동집약적일수록 그 값이 커지게 된다. 노동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은 실질임금 상승률이 생산성 향상 속도보다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행 통계에 입각하여 지난 20년간의 노동소득분배율 추이를 살펴보면 1988년 54.4% 였는데,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1996년 63.4%로 정점에 이른 후 1997년부터 내리막을 걸어 2002년에는 58.2%로 저점에 이른 후 다시 완만하게 상승하여 2007년 현재 61.5%(피용자 보수 45.6%, 기업 및 재산소득 28.6%)에 이른다.

<그림 1> 지난 20년간 노동소득 분배율, 피용자 보수 비율, 기업 및 재산소득 비율 추이


그러면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어떨까? 현재 비교 가능한 최근 시점인 2004년 통계를 보면 미국이 71.1%, 일본이 73.3%, 독일이 68.5%, 한국이 59.3%이다.

이 통계만 보면 한국 노동이 가져가는 몫이 너무 적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동소득에는 임금근로자(피용자)의 보수만 포함되고, 자영업자들의 소득은 기업 및 재산소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한국은 이들 나라에 비해 임금근로자 비중이 66%로 미국(92.5%), 일본(84.8%), 독일(87.7%)에 비해 18.8%p~26.5%p가 낮고, 자영업자 비중은 그만큼 높다. 바로 이 때문에 2005년 12월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임금근로자에 비해 열악한 자영업자를 임금근로자로 간주하여 계산한 이른바 ‘보정 노동소득 분배율’을 발표하였다.(이주경, 이경범 박사) 이 수치는 한국이 2004년 현재 73.6%, 1995~2004년의 10년 평균 75.2%로 OECD주요국에 비해 높게 나왔다.(포르투갈에 이은 2위였다) 그런데 보정 노동소득 분배율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도 않고, 임금인상 자제를 호소하려는 경총의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기에 설득력을 별로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용자 보수(A)를 임금근로자 비중(B)으로 나누어 보면 임금근로자 1단위가 평균적으로 가져가는 몫이 나온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미국은 62.5, 일본은 60.1, 독일은 59.2, 한국은 67.1이 나온다. 이로부터 한국의 임금근로자가 평균적으로 더 많은 잉여를 가져간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한국은 노동의 양과 질은 별로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전임교수-시간강사, 공공부문-(중소)민간부문, 산업별 임금 격차가 극심하다.(자산 소득 격차는 더 심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논외다)

단적으로 기업 대부분이 공기업이거나 대기업인 전기, 가스, 수도 사업의 경우 월평균 임금은 396만원인데, 제조업 평균은 273만원, 건설업은 263만원, 도소매 업은 270만원, 음식 및 숙박업은 183만원이다. 대기업만 가지고 따진다면 전기, 가스, 수도 사업과 유사한 수준과 추세(15년 동안 경향적으로 그 격차가 커짐)를 보인다.

<그림 2> 주요 산업별 임금 총액 추이(1993~2007)


▲ 김대호 소장
한국의 임금근로자가 미국, 일본, 독일 등에 비해 잉여를 많이 가져가고, 그 중에서 (노동의 양과 질이 특별히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공기업의 임금 수준이 특별히 높고, 고용이 안정적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취업자의 6~7% 수준의 조직노동이 얼마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이윤을 많이 남긴다면 노동운동과 조세정책 등을 통해서 피용자 보수 비율이 더 올라가도록 해야 한다. 설사 피용자 보수 비율이 OECD 1위라 할지라도......또한 늘어난 노동의 몫을 열악한 노동자의 소득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써야한다. 그렇다면 과연 자본의 상태는 어떨까? 이는 다음에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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