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론으로 조선명운 극복노력한 인물"
"척화론으로 조선명운 극복노력한 인물"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1.0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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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김상헌과 석실서원(3)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2. 김상헌과 석실서원

석실서원은 김상헌·김상용 형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인데 굳이, 이 두 사람을 조명하고 거론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하나는 주자학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인조 효종 임금 연간의 치세에서 국난에 임하고 해결하는 방식의 극명한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이 이때만큼 확실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고, 반복되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민족이어야 난관에서 오류를 줄이고 최대한 공약수를 도출, 역사를 발전시킬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안동김씨에 대한 오해를 줄이거나 풀어내기 위해서다. 김상헌 김상용 형제는 분명 안동 김씨이나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경향은 남인계열의 전통적 안동 김씨와는 다른 행보를 한 가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 혼맥과 사승관계 때문일 것이다. 흔히 청음 계열의 후손을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김씨라고 불렀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해서 쓴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첫 대목이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병력이 1만3천, 양곡은 1만4천3백석, 장220항아리 정도로 군병을 약 50일간 먹일 수 있는 식량뿐이었다. 임란에 지원군을 보냈던 명나라는 내부 사정으로 파병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조선은 홀로 청나라 군대를 상대하여야 했다. 반면에 청태종 홍타이치가 이끄는 20만의 군사는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남한산성으로 밀려왔다.

이때가 인조15년(1637년) 12월 16일이었다. 결국 1월30일, 인조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휘하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서기까지 44일은 조선 역사에서 척화파와 주화파간 가장 첨예한 대립의 시기였다. 이것은 단순하게 보면 적군을 맞아 어떻게 싸우고 대처하느냐의 문제였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세계관의 문제였다. 즉,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론은 문명이 없는 오랑캐에게 어떠한 경우라도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최명길을 필두로 주화론자들은 현실을 인정, 청나라와 교섭하여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김상헌(척화론)과 최명길(주화론)

 

 

지천 최명길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는 온갖 모함과 적진을 오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전란의 종식만이 종묘사직과 백성을 구하는 길이라는 일념으로 목숨을 내놓았다. 청음 김상헌은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의리와 명분이 무너지면 신하와 백성들이 의지할 가치관이 무너져 나라 또한 망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했다. 두 사람의 간의 현실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식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는 똑 같았다. 이 둘의 예에서 보듯 현실을 인식하는 세계관은 달랐으나 조선 유학자에게 있어 병자호란이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주자학으로 무장한 선비들이었던 만큼 청의 무력에 제압당하는 중화문명의 중심 명나라의 모습은 어떤 위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병자호란은 바로, 이 쇠퇴해가는 문명 중심국의 비애가 막 바로 조선으로 여진이 번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세주처럼 떠받들고 있던 명나라마저 구원병이 되어 조선을 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선비들은 각기 자신의 세계관으로 이 초유의 난국을 헤쳐 나가려 했다.

김상헌은 바로 친명배청의 중심인물이었다. 그의 형 김상용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 둘째아들 봉림대군, 셋째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갔으나 함락되는 바람에 남문루를 불사르고 그 속에 몸을 던져죽었듯, 척화론자에게 오랑캐에게 몸을 숙이는 치욕은 죽기보다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때문에 그들 척화파들은 죽기를 각오하며 끝가지 항전했다. 권순장, 김익겸, 이돈오,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주자학에 철저하고자 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기꺼이 자신들이 믿는 신념에 죽어가거나 스스로 죽었다.

청음 또한 남한산성이 완전히 포위된 지 23일째인 1637년 1월18일, 지천 최명길이 청나라 진영에 보내는 화친 국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걸음에 달려와 그것을 찢어버렸다. 그런 청음이 지천에게 말하길 “자네의 선대부께서는 사우(士友)들 사이에 지조 있는 선비라고 추앙받았는데 자넨 어찌 그 모양인가. 선대부께서 통곡을 하고 계실 것일세.” 그리고 바로 편전으로 달려가 인조에게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만약 지키지 못하더라도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6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고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목을 매 자살을 하려고 시도했다. 청음의 입장에서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야 하는 치욕이란 관념적으로도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조가 성을 내려가 삼전도의 수항단에서 청태종 홍타이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으로 병자호란을 매듭짓자 청음은 그해 2월에 고향 안동의 소산에 청원루를 짓고 은거했다. 이러한 청음의 강직한 절개는 한편으로 역사적 인식의 한계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국서를 찢은 청음도 옮고 그것을 붙인 지천도 옳다고 말하지만 청음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지천이 남한산성의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족의 괴멸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했던 지천 최명길의 용기와 판단을 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청음과 지천이 다시 회우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둘은 척화론과 주화론으로 대결한 17세기 최대 라이벌이었다. 청음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안동 학가산 자락에 목석헌을 짓고 은거하고 있을 때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청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자 상소로써 극력하게 막아서다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음은 안동 서미리에서 멀고 먼 청나라로 압송되었는데 이때의 심정을 담은 시는 지금도 너무나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 떠나고자 하랴 만은 시절이 하 분분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지천 또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치면서 전후처리에 힘쓰다가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이규의 고변으로 심양으로 압송되는 처지가 되었다. 타국 땅에서 옥에 갇힌 죄인의 몸으로 다시 만난 둘은 그때서야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시 한 수씩을 주고받는다. 청음이 먼저 읊었다. 從尋兩世好 頓釋百年疑(조용히 두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려.) 지천의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그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는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돌리기도 한다오.)

이 얼마나 기막히고 멋진 비유인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척화론과 화친론을 단순히 이분법적 대비로써 상극으로만 취부해 무조건으로 당파싸움으로 매도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역사인식은 일제로부터 주입된 교육의 잔재다. 국익 우선을 먼저 생각하더라도 방편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대책이 다를 수 있음을 생각지 않는 것이야말로 협소한 역사인식이 아닐 수 없다.

청음은 인조 23년(1645) 6년간의 치욕적 볼모살이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좌의정을 제수받고 여러 번 사양했으나 임금이 승지를 보내옴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취임했다가 이내 사직하고 만다. 인조가 죽고 그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이 역시 거절했다. 효종3년(1652)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제향인물

‘조선왕조실록’이나 ‘증헌문헌비고’에 따르면 석실서원은 김상용과 김상헌을 배향한 서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석실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 이 서원은 석실 김상헌을 위한 서원이었다. 이 같은 정황은 서원이 설립된 지 17년 뒤에 송시열이 쓴 ‘석실서원묘정비’에 분명하고 밝혀두고 있다.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고 형인 김상용을 오른쪽에 배향한 것은 그 또한 병자호란에 임하여 도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김상헌 김상용 형제가 갖는 의미란 자부심 그 자체였다. 고난에도 꺾이지 않은 불굴의 저항정신은 선비들이 지녀야할 자존심이면서 정체성이었다. 이러한 김상헌의 정신은 송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노론계열로 계승되었다.

설립당시 두 형제를 모셨던 석실서원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이 함께 배향되었다. 이후, 김수항의 두 아들인 김창집과 김창흡, 김원행(김창집의 손자)과 그의 아들 김이안, 마지막에 김조순(김창집의 현손)에 이르기까지 총 11명이 배향되었다. 이 중 이단상과 민정중을 제외하면 모두 안동김씨였다. 이단상과 민정중 또한 안동 김씨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민정중은 김창협과 사돈간이었으며 이단상은 김창협의 장인이었다. 그러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하나 같이 뛰어난 재목들이어서 제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향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김수항은 김상헌의 손자이며 34세의 나이로 일약 예조판서에 발탁되고 44세에는 우의정, 이어서 좌의정과 영의정에 오르는 등 불세출의 정치권 스타였다. 민정중은 송시열 문인으로서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는 형제간으로 좌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이단상은 김수항과 민정중 보다 이른 인조 27년(1649)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41세로 단명하는 바람에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으나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좌의정 (이정구)이고, 아버지 또한 대제학(이명한)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적으로 활동했던 숙종 연간은 환국의 시기였다.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숙종이 환국정치를 강행하는 상황에서 정치기반이 탄탄한 이들이었으나 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원자로 삼으려고 촉발된 기사환국에서 서인들이 강력 반대하자 숙종은 남인정권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김익훈이 참형에 처해지고 송시열 김수항 김수홍 형제는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민정중 역시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죽고 난 이후에도 정치적 부침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인현왕후가 다시 등극하는 갑술환국에서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으나 신임사옥의 여파는 서원에서 이들의 위패가 철거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정권이 실각하자 정치적 대립구도는 노론과 남인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바뀌었다.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왕위에 오른 경종(희빈장씨 소생)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들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훗날 영조)을 세제로 책봉했다. 그런데 노론정권은 한발 더 나아가 경종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세제(世第)에 의한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소론의 반격을 받았고 그 결과 이 일을 주도했던 이른바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는 유배되었다가 끝내 처형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임사옥이었다. 이 때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면서 김창집의 동생인 김창협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김창협과 감창흡은 철학과 문학 방면에서 당대 및 후대에도 서울 및 인근 지방을 선도했던 걸출한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이들은 율곡 이이에서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학문적 정치적 배경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가 간혹 오해하는 것이 안동 김씨(장동김씨)라는 명칭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헷갈리기도 하지만 60년간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는 비록 안동 소산에 뿌리를 두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퇴계학맥을 이은 남인 계열과는 적대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원행은 김창집의 친손자이면서 김창흡의 양손자였다. 김원행은 김창흡에게 배웠고 낙학의 학맥이 김원행에게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원행은 벼슬의 유혹을 멀리하고 한 평생 석실서원에 머물면서 100명의 유생들과 함께 학문에 매진했는데 이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대학자들이 많이 탄생했다. 김조순은 김창집의 현손인데 그의 당숙인 김이소가 영의정을 지내는 등 노론시파의 영수였다. 말년에 정조가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함으로써 안동김씨 일문이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고 세도정치를 막을 여는 계기가 된다.

장동 안동김씨의 가계를 종합해 보면 이들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안동김씨 소산파 김번을 기점으로 해서 보면 그의 손자가 김상헌 김상용이며 이후 이 가문에서 임금의 장인이 3명, 임금의 사위가 2명, 영의정 8명, 좌의정 4명, 우의정 3명, 대제학 7명, 육조판서가 51명, 관찰사 46명, 유수 31명이 나왔다. 실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안동김씨의 세도를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석실서원은 주향자인 김상용과 김상헌의 순절과 저항의 고귀한 뜻이 서려있는 서원이라는 점이다. 지금은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서원이 훼철되어 사라지고 없지만 이 두 형제의 순고한 정신은 기리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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