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길에 맞선 堤防-‘포항제’·‘송제’
수백 년 간 안동을 지켜내 왔다’
‘큰 물길에 맞선 堤防-‘포항제’·‘송제’
수백 년 간 안동을 지켜내 왔다’
  • 김용준 기자
  • 승인 2015.04.11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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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水 관련 비문을 통해 본 조선판 협동사업!
반변천 송제와 낙동강 포항제는 영남 안위 제1방어선

역사 속에서 안동(安東)이라는 현재의 지명 이외에 영가(永嘉)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안동지역의 지세(地勢)를 잘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인 1608년(선조41년)에 편찬된 안동지역 지방지인『영가지(永嘉誌)』기록을 보면, 지지(地誌)의 명칭을 두고 논의가 활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永)’은 이수(二水)의 합자(合字)이며, ‘가(嘉)’는 아름답다는 뜻으로 ‘영가’는 곧 낙동강 본류와 반변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안동의 지세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적절한 지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그 옛날부터 동쪽지역인 영양, 청송에서 흘러오는 반변천과 태백에서 발원한 물길이 낙동강이 되어 흐르다가 대도호 안동부의 입구 지점에서 합류하게 된다. 마치 입술과 이빨의 관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이 대지 위에 터를 잡기 시작한 후부터 두 갈래로 호호탕탕 쳐들어오는 물길은 늘 대홍수를 불러 왔다. 수해를 막기 위한 제방(堤防)을 튼튼히 하는 치수(治水)라는 난제를 극복해야만 관개(灌漑)수로를 잘 관리할 수 있었고, 농사를 천직으로 삼아 터전을 일궈온 백성들의 안녕을 강구할 수 있었다.

 

▲5백리를 흘러온 낙동강 줄기(위쪽 왼편 안동댐쪽)와 2백리를 흘러온 반변천(위쪽 오른편 임하댐쪽)이 이곳에서 합류한다. 대도호 안동부의 지대가 마치 강물을 베고 있는 형국이다.

두 개의 제방, 안동부 존폐 가름하는 보호벽

대도호(大都護) 안동부(安東府)의 지대가 마치 강물을 베고 있는 형국이라 낙동강과 반변천의 물은 평시에는 생명수지만, 장마철이 다가오면 큰 해(害)가 되었다는 언급을 볼 때 늘 치수(治水)와 관개(灌漑)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태백산과 일월산의 발원지로부터 장마철 폭우를 한꺼번에 싣고 수 백리를 물밀듯이 내려오는 낙동강과 반변천의 거센 대홍수에 맞섰던 역사가 있었다. 민(民)과 관(官), 군(軍)이 안동부를 보호하기 위해 제방을 쌓고 또 쌓았던 건설과 파괴의 시간이 녹아 있었다.

조선시대 지방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낙동강 5백리, 반변천 2백리 상류에서부터 지류가 합쳐져서 형성된 낙동강과 반변천의 두 강물은 주기적으로 안동부성을 휩쓸고 지나가 하류지역의 풍산평야를 포함해 농지와 민가에 처참한 수마(水魔)의 상처를 입혔다. 장마철이 다가오면 강기슭 주민들은 늘 두려움에 짓눌려 지냈고 대홍수로 두 곳의 방제가 유실되고 중수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적혀 있다.

이에 안동부의 존폐를 가름하는 보호벽인 두 개의 큰 제방은 마치 외적의 침범을 막아내는 국경수비대처럼 물의 침입을 가로막는 최선봉의 역할을 떠안게 되었다. 수시로 발생한 제방의 유실과 이를 중수, 재축성하는 역사기록의 과정을 살펴보면, 벼슬을 가진 자는 애민과 애향의 정신을 가졌었고, 부자는 재물을 내놓았고, 기술자와 백성들은 몸소 노동을 아끼지 않았다고 서술되고 있다.

안동(安東)-‘강물을 베고 누웠으니 늘 위태로웠다’

『영가지』(영가지는 1608년(선조41년) 권기가 편찬한 안동읍지)와『안동읍지』(안동부읍지는 1899년(광무3년)에 편찬된 안동군의 읍지)에 따르면 옛날부터 안동부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제방(堤防)이 있었다. 송제(松堤)와 포항제(浦項堤)이다. 송제는 반변천(半邊川)의 큰 물길을 막아 맛뜰(용상동)을 보호하는 제방으로 부의 동쪽 10리에 있었고, 포항제는 낙동강의 홍수를 막아 부성(府城)을 보호하는 제방으로 부의 동쪽 2리에 있었다. 포항제는 임청각(臨淸閣) 밑 개목다리에서 옥야천을 지난 영호루(映湖樓) 아래까지다. 조선 중기 이전의 기록이 없어 단지 추정에 불과하지만 중기 이후부터는 큰 홍수가 발생했다는 재난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영가지 제언(堤堰)편에 기록된 송제 관련 글에는, “을사년(선조 38년, 1605년)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무너졌다. 포항제와 함께 일시에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가을에 일을 마쳤다. 돌비석이 있는데 교리 권태일이 이 비문을 썼다”고 전한다. 또한 영가지에 기록된 포항제 관련 글에는 “을사년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송항(半邊川)의 물이 포항(洛東江)에 부딪치고 두 강물이 서로 뒤섞여 혼란스럽게 되었다. 부성은 물에 잠기고 민가는 모두 유실되었다”고 언급된다. 이에 부사 김륵(金玏)이 수사에게 각 읍의 군민을 동원하도록 글을 올렸고, 그해 9월에 일을 시작하고 다음해 봄에 일을 마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두 제방은 다시 1634년(인조 12년)의 대홍수로 무너져 중수를 하게 되고, 1775년(영조 51년)과 1776년(영조 52년)에 또다시 수해를 입는다. 이어 1777년(정조 1년)에 다시한번 대홍수를 겪게 된다. 이렇듯 두 갈래의 강물은 큰 물줄기를 형성해 주기적으로 두 개의 제방이 무너뜨리고 성 안의 고을로 밀려 들어가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힌다. 대홍수를 겪을 때마다 제방이 수시로 무너지고 많은 백성이 익사를 당했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송제비. 안동 선어대 절벽 바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송제(松堤)-‘귀신이 도와주듯 18만여 명이 다시 쌓았다’

그러나 제방을 다시 축성하는 대규모 사업은 관민 전체의 협동심으로 발휘되었다. 이러한 기록이 현재 두 개의 비문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실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먼저 송제사적비(松堤事蹟碑)는 안동시 용상동에서 안동대학교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선어대’라는 절벽과 강물이 완만히 굽이쳐서 흐르는 큰 하천이 있는데, 과거 국도 길을 따라가면 선어대 산 아래 국도변에 송제사적비가 서 있었고, 절벽 바위에는 송제(松堤碑)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안동시 송천동 산 274번지에 위치한 선어대 생태공원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송제사적비. 안동시 용상동 선어대라는 절벽아래로 강물이 굽이쳐서 흐르는데, 그 국도 변에 서 있었다. 지금은 선어대 생태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1780년 경자년(경자년) 9월에 세워진 송제사적비의 원문이다.

(松堤事蹟碑)

去府治十里而近而有松堤卽東來河流與城底洛水相唇齒焉萬曆乙巳大水也時金侯栢巖公
玏與邑人前縣監李庭檜盡力築堤以防直擣之勢今有碑在縣崖 上之元年丁酉又値巨浸比
乙巳患尤劇惟我金侯依古事牒營門告鎭管用戊戌春役十八萬餘丁先畢內提松防繼之未數
月而功告訖殆神運而鬼輪之也於虖壯哉繼自今城池克鞏民安物阜則惟候之德豈不與己事
甲乙千古耶倣乙論議立石而未就後三年始治石先立丙堤略紀顚未及上下任事又竪于舊碑 之下實庚子九月 日也

行 縣監 金侯尙默
營將 李公健秀
都監 幼學 金時慶 金始萬
監官 別將 權克履
千惚 朴師龍
領將 哨官 權昌晦 金就興
都色 權昌文 權鳳新 金思揮 權鳳彬

번역된 글은 다음과 같다.

“안동부에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송제라는 것이 있으니 동쪽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성밑의 낙동강물과 서로 입술과 이빨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 대홍수가 났을 때 부사인 백암 김공(金公) 륵(玏)이 읍민들과 전 현감 이정회(李庭檜)와 함께 온 힘을 다해 제방을 쌓아 바로 부딪치는 큰물을 방어하고자 했다.
지금 비석을 만들어 바위 위에 세워 두었으나 상(上)의 원년 정유(1777, 정조 원년)에 또 다시 큰 풍랑을 만났는데 그 피해는 을사년보다 더욱 심했다. 그래서 우리 김 부사께서는 옛일에 의거해 영문(營門)에 공문을 보내고 진관(鎭管)에 알려 무술년 봄에 18만여 명의 일꾼으로 안 제방을 다 쌓고 나서 이어서 송제(松堤)를 쌓았는데, 몇 달 되지 않아 공사를 모두 마치니 그것을 대개 귀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인 듯 했다.
아, 위대하도다! 이어서 성지(城池)를 공고하게 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며 만물이 살찜은 오직 부사의 덕이 지난 일과 더불어 천고에 갑을이 되지 않겠는가. 을사년의 예를 따라 빗돌을 세우려고 의논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3년 뒤에야 비로소 돌을 다듬어서 안 제방에 먼저 세우고 그 전말 및 앞뒤로 일을 맡은 이력을 기록하고 또 옛 비석 아래다 세웠으니 경자년 9월 일이다.”

 

▲어방사적비. 안동댐 건설 당시 보조댐 공사장 주변 모래사장에 묻혀 있다 발견되었다고 한다. 포항제 쪽에 세워졌고 갑술년(1934년) 또는 을축년(1936년) 홍수 당시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포항제(浦項堤)-‘2백년간 둑 무너질때마다 제방을 다시 쌓으니’

다음으로 어방사적비(御防事蹟碑, 또는 호방사적비 湖防事蹟碑)는 1780년 경 낙동강 본류의 홍수를 막아 안동부의 성(城)을 보호하던 제방인 포항제를 중수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처음에는 비각(碑閣)이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비만 회수하여 법흥동 7층전탑 부근에 세웠다고 하는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안동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대 탁본본은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다음은 어방사적비(御防事蹟碑) 탁본 원문이다. 비문은 마멸이 심해 정확히 읽을 수 없다고 한다. (▨부분은 마멸 된 부분이다)

(御防事蹟碑)

上之三年戊戌中我侯金公莅治之三年也春正月築松浦兩項堰長各▨▨▨」
三丈廣稱焉惟安東爲嶺南根柢舟車人物之所都會而地枕河洛▨▨▨▨」
萬曆乙巳爲一劫會時則金侯柏巖先生玏告于方伯轉聞 朝▨▨▨▨▨」
防之其後二百秊間隨圮隨補如孟▨冑瑞丙辰之築堤葺樓李▨▨▨▨▨」
之劃田峙糓▨近古偉績而亦所以績成來後者也」
英宗乙未水大至潰浦▨牒▨▨濱江民戶渰沒甚从丙申調邑丁▨▨▨▨▨」
又大水松川先潰浦堰隨缺兩江澒洞▨湊邑㞐城餘數版侯被▨▨▨▨▨」
水道招諭邑民曰勿動卽牒告觀察使李公性源到牒巡省援舊▨▨▨▨▨」
朝得鎭丁烟丁六萬赴三▨役役士八萬觀察公又以本鎭帥攝▨▨▨▨▨」
▨人擇吏校俾各事事規模措畫擧得其宜役目而民不病四閱▨▨▨▨▨」
噫虖壯㢤邑人咸曰維侯維伯曁鎭帥俱以世臣殫誠致力以能▨▨▨▨▨」
國捍禦于民是宜用乙巳故事勒諸石來世遂略記事蹟月日▨▨▨▨」
庚子九月日碑始成尹侯師國來莅百廢俱興凡▨」
係防事有隆無替而又手書石面篆隸信異事▨▨」

行 縣監 金侯尙黙
營將 李公健秀
都監 幼學 金相玉 李孝錫
監官 千摠 朴師龍
前 別將 權衡國
領將 哨官 權昌晦
都檢 權鳳新 權昌文 金思渾 權鳳彬

 

▲현재 어방사적비는 안동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홍수로 유실된 제방을 새롭게 쌓아 백성의 안정을 도모하고 재난극복을 위한 협력과 그 의의를 서술해 후대의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비록 마멸된 부분이 빠져 있으나, 포항제비의 내용은 안동부읍지(1899년, 광무 3년에 편찬된 안동군 읍지) 이상경(李尙慶) 기(記)에 수록되어 있어 대략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금상 3년 무술년(1778년)은 김후가 부를 다스린 지 3년이 되는 해이다. 그해 봄 정월에 송항과 포항에 제방을 쌓으니 길이는 각 7리, 높이는 3장이며 폭도 그에 걸맞았다. 안동은 영남의 뿌리이며 동국의 인물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지대가 강물을 베고 있는 형국이라 낙동강이 큰 해가 되었다.
만력 을사년에 한차례 홍수가 발생하자 부사인 백암 선생이 관찰사에게 공문을 올리고 조정에 보고하여 삼진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았다. 그 후 200여 년 동안 둑이 무너지면 그때마다 보수를 하였는데, 부사 맹주서가 병진년에 제방을 쌓고 누대를 수리한 일과 이중협이 경술년에 전답을 구획하고 곡식을 비축해 두었던 일이 근고에 뛰어난 업적이며 이들 역시 임무를 부여받고 온 자들이었다.
영조 을미년에 큰 홍수가 발생하여 포항의 표호루가 무너지고 강가에는 물에 잠긴 민가가 아주 많았다. 병신년에 고을 장정들을 징발하여 무너진 집들을 보수 하였다. 정유년 가을에 다시 큰 홍수가 발생하여 송항이 무너지고 포항의 둑이 뒤따라 무너졌다. 두강물이 요동쳐 곧장 고을의 거주지와 성곽 여러 판을 덮쳤다. 그러자 부사는 조리를 뒤집어쓰고 덧신을 신고 물길을 두루 살펴보더니 읍민을 불러놓고 ‘동요하지 말라’고 하였다.
즉시 관찰사 이성원에게 공문을 보내 상황을 알리고 순행하면서 상황을 살피고 옛 관례에 따라 원조를 해주고 조정에 계달 하였다. 진의 장정 6만을 동원하여 사흘에 걸쳐 18만 명이 부역을 감당하게 하였다. 관찰사는 또 본진을 통솔하여 공사를 감독하고 부사는 향인과 아전, 포졸을 선발하여 일을 맡기고 규모와 계획을 정하여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니 대규모 부역이었지만 백성들이 힘들어 하지 않았다. 넉 달이 지나 두 제방이 완성되었다.
아, 장엄하도다! 읍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사와 관찰사가 본진의 군사를 통솔하고 세신의 정성과 능력을 다해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들을 지켜 주었네. 이는 의당 을사년의 고사를 따라 비석에 새겨 후세에 보여야 한다’ 하였다. 마침내 사적과 일월을 다음과 같이 적어둔다.”

 

▲송제비와 송제사적비가 보존되어 있는 선어대 생태공원. 국토보존과 치수관개 사업에서 선조들은 계층과 신분의 처지를 뛰어넘는 환난상휼의 정신으로 제방 건설과 증축을 추진했다. 안동시내를 둘러싼 두 개의 제방에 얽힌 비문과 향토지의 기록을 통해 당시 선조들의 고난과 극복, 리더십과 단결의 교훈을 전해 주고 있다.


치수사업에서도 환난상휼, 협동정신 온전히 실현

위 두 개의 비문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치수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자세를 알 수 있다. 먼저 나랏일을 맡아 관청에서 고을을 관장하는 관료들은 제방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같이 백성을 직접 독려하거나 격려했으며, 유실되었을 때는 앞장서서 애통해하며 복구를 서둘렀다. 또한 부역은 농사철을 피했고 급박할 때는 진관의 군사까지 대대적으로 참여시키고 있다.

안동부사 김후는 “고을사람들이 제방에 의지해 살아 왔는데 이제 그 둑이 무너졌으니 우리고을이 없어진 격이다. 둑을 수리해 후환에 대비해야 한다”며 지역 원로들과 긴급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막바로 관찰사 유영순에게 편지를 올려 14개 고을의 장정을 선발해 제방 축조에 나서고 있다.

을미년(1775년, 영조51년)에 큰 비가 내려 포항제가 무너져 물에 빠져 죽은 백성이 많았고, 다시 정유년(1777년)에 큰 홍수로 송제가 먼저 무너지고 포항제 둑이 무너져 고을을 덮치게 된다. 이때 “부사는 조리를 뒤집어쓰고 덧신을 신고 물길을 두루 살펴보면서 읍민에게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에 관찰사 이성원에게 상황을 알리자 관찰사가 직접 진관의 장정 6만 명을 통솔해 공사를 감독하고, 부사는 공사의 규모와 계획을 정하고 향인과 아전, 포졸을 선발해 일을 맡기고 있다.

또한 백성을 동원할 때는 겨울인 10월에 시작해 다음 해 봄에는 농사일에 방해가 되는 까닭에 부역을 멈추었다가 4월에 다시 공사를 재개해 동지에 마무리를 했다. 급박할 때는 진관의 군사를 동원하기도 했다. 나아가 제방의 명칭이 저속하다고 판단해 개명을 하기도 했다.

한편 영남을 관통해 흐르는 1천3백리 낙동강에서 상류유역인 안동부가 치수와 관련해 지리적으로 차지하는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안동은 영남의 뿌리이며 동국의 인물이 모여 있는 곳이다. 안동의 흉폐가 곧 영남의 안위에 관계되기 때문에 관찰사가 직접 나서서 경상좌도 14개 고을의 민정(民丁)을 뽑아서 제방 복구공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안동지역 백성은 물론이고 멀리 영해, 진보, 봉화, 용궁, 청송 등 14개 읍민들이 제방을 구축하기 위해 안동으로 집결했고 연인원 18만명의 힘을 모아 수개월 만에 준공하게 되었다.

이렇듯 국토보존과 관련된 치수사업에서도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온전히 실현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계층과 신분의 처지를 뛰어넘어 어렵고 고된 제방건설 및 증축사업에서 서로 돕는 협동사업의 전형이 나타나고 있다. 다시말해 제방을 둘러싼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그 대응과 복구 과정은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고 있으며 이는 고을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로 늘 인식돼 왔다는 점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수십 차례의 유실과 증축을 거친 제방의 용도가 많이 변해 흔적조차 희미해져 있다. 하지만 현재의 안동시내를 둘러싼 제방에 얽힌 비문과 향토지라는 기록의 창문은 당시의 풍상을 약간이나마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지역의 향토사에 진하게 묻어 있는 선조들의 고난과 극복, 리더십과 단결의 교훈까지도 덤으로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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