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치와 원리를 세운 대학자'
'세상 이치와 원리를 세운 대학자'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18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연재 - 도산서원과 퇴계, 애제사 조목>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4]

도산서원과 퇴계 그리고 애제자 조목

서원은 강학기능을 갖춘 유교식의 학교인 탓에 반드시 제향 된 인물이 있다. 지역의 이름난 유현의 사묘를 세워 그 뜻을 받들어 모시고, 원을 세워 후학을 교육했다. 도산서원은 바로 전형적인 이 두 기능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도산서원에서 퇴계 선생이 길러낸 제자가 300명이나 되었고, 사후 이들에 의해 영남 유림의 학통이 형성되었다.

퇴계는 사상적으로 조선에서 최초로 주자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이해한 주자학을 실천으로 옮긴 대유(大儒)다. 때문에 이황을 두고 유학 도통의 연원을 중국에서 조선으로 옮겨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나아감으로써 얻으려 하기보다 물러섬으로써 지키고자 하였다.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학문하는 자세였으며 심오한 마음의 경지를 터득하려는 일관된 몸짓이었다. 그의 이러한 치열한 정신은 명예로운 관직마저 미련 없이 버린 데서도 알 수 있다. 홍문관 대제학은 문형(文衡)으로 불린 데서도 알 수 있듯 학문하는 자에게 최고로 영예로운 자리였다.

그러나 퇴계는 임금의 간청에 마지못해 두세 달, 재임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성균관 대사성 자리도 언뜻 생각하기로 말년에 제자를 기르기를 원했던 그의 소망에 비추어 그보다 합당한 자리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는 이마저도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성균관 대사성은 요즘으로 말하면 서울대학교 총장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성균관은 국가의 관료가 될 인재들을 교육하는 유일무이한 정부기관이었던 만큼, 지금처럼 대학이 난립한 상태의 서울대학 총장과는 비견될 바가 못 되었다. 때문에 과거로 입신양명하려는 전국의 선비들이 앞 다투어 입학을 했던 성균관은 어떤 면에서 현실 정치에 맨 선두에 서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벼슬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을지언정, 학문의 요체를 밝히고자 몰두의 시간이 필요했던 퇴계에게는 성균관은 오히려 번잡하고 학문의 원리를 세우는데 방해가 되는 공간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려 체계를 세우고자 한 것은 이른바 심학(心學)이고, 성학(聖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자학을 탐구하여 세상의 이치와 그 도덕적 원리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른바 평범한 인간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바탕 위에 퇴계의 성리학은 그 체계가 구축되었다.

퇴계의 철학을 요약한다는 것이 간단치 않지만 대략 파악한다면 삶과 학문의 궁극적 목표를 인(仁)을 체득하고 이(理)인 바의 본래 근원으로 돌아가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 속에 그의 사상이 펼쳐져 있다. 그는 일관되게 변하지 않는 것, 지고지순 도덕적 원리를 발견하고자 몸부림 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후학들의 존숭은 앎으로 체득한 사상의 지속적 실천에 있었다. 그의 경론(敬論)은 실천의 방편이었다. 천리를 회복하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경에 있다고 믿었다. 퇴계에 있어 경의 의미는 천리의 인애를 구하고자 하는 삶의 양식이었으며 성인의 학문을 쌓는데 필수적인 마음의 자세였다.
그는 바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삶의 여건과 조건들을 최우선으로 두었기에 사색하고 제자 기르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황의 애제자 조목

도산서원에는 거유 퇴계와 그의 애제자이었던 월천 조목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선생의 사후 퇴계를 배향한 서원은 경기도를 제외한 조선7도의 29개 서원에서 봉사(奉祀)되었다. 조목은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인 1615년 도산서원 상덕사에 존향되었다. 중앙에는 퇴계의 위패가 그 오른편에 월천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서애와 학봉, 한강이 제향 되지 않고 제자 중 월천만이 선생 곁에 모셨진 배경에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퇴계의 제자 중에 전국적으로 우뚝 솟은 인물이 많았었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월천은 일찍 벼슬길에 나선 학봉이나 서애와는 달리 산림처사로서 도산서당을 지키며 학문에만 전념했고, 퇴계 사후에는 선생의 가족까지 돌본 고족이었다. 월천이 얼마만큼 스승에 대한 성심을 다했는지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는 15세에 이황 문하에 입문한 후, 47세 되던 해에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결 같이 그 곁을 지켰다. 1570년 11월 이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정성을 다해 간병했으며, 그해 12월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1년 동안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3년 동안 웃는 자리를 피했다. 1572년 조정에서 동몽교관이라는 벼슬을 제수했으나 스승의 상중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으며, 1576, 상기를 마치고 출사할 때까지 오로지 스승과 관련된 일들을 매듭짓지 위해 고군분투했다. 상덕사(1574년)를 세우고, 스승의 언행을 모은‘퇴계선생언행총록’ 편찬하고, 이황의 저술인 ‘이학도통’에 발문을 붙여 간행을 했으며, 연보를 정리하고 문집을 교정 편집하는 작업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봉화현감으로 출사를 한 후에도 매월 두 차례 삭망마다 도산서원에 모여 원생들과 강학을 했다. 65세로 합천군수로 재직 중에는 생전에 스승에게 받은 편지들을 모아 8권의 책으로 엮었다.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목은 오로지 성심으로 스승을 떠받드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이러한 그의 행적 때문에 퇴계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조목만이 그의 사후 퇴계를 모신 상덕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당시 월천을 퇴계와 함께 배향하는 문제는 적어도 겉으로는 이견을 표출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 광해군 시절, 북인정권이 그를 비호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만년에 조목이 서애와 반목하였던 반면, 광해군 치세기의 북인정권의 핵심이었던 정인홍과는 절친했기 때문이다. 북인정권하에서 남인이었던 안동 출신들이 대부분 조정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조목에게서 배웠던 예안 출신 제자들 중 다수가 북인정권에 참여를 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에 광해군 시절 조목의 상덕사 배향은 정치적 해석이 개입할 근거를 남겨놓았다. 그러나 위 열거의 예에서 보듯 스승 이황과 연관하여 그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도산서원 배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의 발로였다고 보여 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