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앞에서 호랑이 기상으로 강직했던 신하'
'임금 앞에서 호랑이 기상으로 강직했던 신하'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6.0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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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김성일과 임천서원>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8]

김성일과 임천서원

► 최성달 (작가)
최근에 학봉을 대면한 것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임노직 책임연구원이 앞장서서 국역한 주왕산지를 통해서다. 몇 번을 읽었는데 여러 유학자의 한시 가운데서도 유독 학봉의 시가 마음에 와 닿았다. 임금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직언을 잘하여 전상호((殿上虎, 임금 앞의 호랑이)였던 학봉의 성정과는 거리가 먼 시였다. 지극히 고요함으로 얻을 수 있는 평화로운 서정과 차원 높은 정신이 빗어낸 도학이 가지런히 정제되어 있었다. 그는 불의 앞에 굽히지 않은 불을 품고 있으되 발함은 언제나 배운 바의 실천을 확고한 주자적학적 세계관의 중심에서 포효하는 용맹성이 아니라 마음 안으로 고요히 정제된 유학자의 시가 되어 있었다.

학봉 종택은 서후면 검제리에 있고 그를 주향한 임천서원은 안동시 송현동에 있다. 학봉은 청계 김진의 5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다섯 형제가 모두 생원시 이상을 통과했고 셋은 대과를 급제했다. 요즘으로 치면 자식이 셋이나 고시에 합격한 것이니 가문의 크나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학봉은 19세 되던 해 퇴계의 문하에 입교하여 1569년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가형인 극일, 수일, 명일, 그리고 동생 복일과 함께 수학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 형제가 도산서원에 정착하여 공부한 것이 아니라 스승인 퇴계를 따라다니며 배움을 청했다는 사실이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던 소수서원의 입원록에는 이곳에서 공부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학봉을 비롯한 5형제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는 퇴계가 풍기군수 재직시절과 맞물려 스승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며 공부했던 이들 형제의 학문과 인격연마라는 특이한 이력이, 사승관계가 무너진 요즘 세태에 비추어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스승은 이런 학봉에게 요순 이래 유학의 연원과 도통의 정맥에 대해 손수 써서 만든 병풍을 선물했다. 오늘날 그가 퇴계 학맥을 계승한 주봉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스승의 보이지 않은 지원과 사랑이 있었다.

학봉은 27세 되던 1565년에 형 명일 동생 복일과 함께 진사시에 동반 합격했고, 1568년(31세)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사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의 벼슬길은 한마디로 순탄했고 승문원 분관-청요직-호당독서-당상관이라는 전형적인 문신의 최고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갔다. 흔히 학봉을 서애와 비교하여 관직이 늦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애의 경우 오히려 파격에 가깝고, 학봉은 정상적인 엘리트 코스를 빠짐없이 밟아갔다고 이해하면 틀림없다. 보통 7품 이하인 참하관에서 참상관인 정6품에 오르려면 15년이 소요되지만 학봉은 6년 만에 성균관전적(정6품)으로 출륙했다. 사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승진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조선의 관직체계에서 사관출신자의 경우 70% 이상이 당상관으로 승진을 했고 11%가 정승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일반과거 합격자보다 당상관 승진비율이 5배가량 높았다. 더구나 사관은 참하관이어도 엘리트 집단이었기 때문에 정승이나 임금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후, 학봉은 정6품인 병조좌랑(36세), 정5품인 병조정랑(38세)을 역임하고, 39세에는 이조좌랑을, 40세에는 이조정랑을 역임했다. 알다시피 동서분당이 이조정랑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이조좌랑과 정랑자리가 당시 관료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문관의 70~80%가 이들에 의해 임명되고 해임되었고, 청요직인 삼사의 관리임명권은 전적으로 이들에게 있어 국왕도 관여할 수가 없었다. 특히 이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한 관료는 큰 대과가 없는 한 재상까지 승진하는 것이 당시 관직사회의 관행이었다. 이처럼 학봉은 32세에 예문관 검열로 관계에 발을 들어놓은 이래 11년간, 승문원 분관, 예문관의 전임사관을 거쳐 홍문관원, 이조와 병조의 전랑,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 사가독서 등 당하관 시절 거쳐야할 엘리트 코스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거치며 선조를 지근에서 보필했다. 이 시절 학봉은 한마디로 바른말 잘하는 강직한 신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별명은 임금 앞에 호랑이라는 뜻의 전상호(殿上虎)였다.

임금의 형님인 하원군이 악행을 저지르자 학봉이 그의 종을 잡아다 엄하게 문초한 것이나 선조 앞에서 경계하지 않으면 걸주 같은 임금이 될 수도 있다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모습에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학봉이었지만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45세 때 상복을 벗고 정4품인 의정부 사인으로 조정에 돌아온 후, 다음해 정3품인 나주목사로 나가게 된다. 그로서는 처음 맡게 된 외직이었으나 당상관 승급을 위해서는 한번은 거처야 하는 코스였다. 나주목사 시절 해묵은 싸움인 이 고을 나씨와 임씨와의 송사를 해결하는가 하면 대곡서원을 세워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제향한 대곡서원을 건립하는 등 정사를 두루 원만하게 살폈다. 이 공로로 선조로부터 강명(剛明)함을 칭찬하는 조서와 함께 표리일습(表裏一襲)을 상으로 하사받고 승급을 눈앞에 두었으나 뜻하지 않게 사직단 화재사건으로 나주목사직에서 3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49세에 고향으로 돌아 온 학봉은 50세 되던 해, 석문정사를 짓고 외부와의 거리를 둔 채, 스승 퇴계의 문집을 출간하고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오로지 학문과 육영에 전념했다. 그러나 당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국은 다시 그를 조정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종부시정으로 승진하여 환조한 학봉은 곧 봉상시정으로 직책을 옮긴 후, 다음 해에 국빈을 접대하는 예빈시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해, 12월에 일본통신사의 부사가 되어 왜국을 다녀온 뒤, 임란을 맞아 경상우도 관찰사로 56세에 진주공관에서 순직하기까지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학봉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한 것을 두고 당파심에 치우쳐 나라를 그르쳤다고 지적하지만 과연 당파심 때문에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징비록은 이 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는데 학봉은 왜적들이 끝까지 동병(動兵)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으나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고 당황할까 걱정되어 그것을 해명했다는 것이다. 학봉은 가뜩이나 불안한 정국에 민심이 무너지면 능히 적을 방어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그 같은 주장을 했을 것이다. 이 같은 학봉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가 주자학적 세계관에 충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개국이 문명국을 지배하는 일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일면, 정세를 판단하는 세계관에 한계를 안고 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나 이 경우 오히려, 서장관이었던 허성이나 정사였던 황윤길의 현실인식 능력이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봉은 진주공관에서 전쟁을 독려하다 순직하기 몇 달 전 안동 본가의 권씨 부인에게 한글 편지를 보냈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가장 사념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오면 도적이 대항할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지 모르지만 기필 못하네. 그리워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4백년을 이어온 학봉선생 고택의 구국활동>이란 소책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검제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서서 ‘학봉선생구택’이라는 커다란 현판을 걸고 있는 고옥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본류인 퇴계학의 연원 정맥을 근세에까지 이어온 우리나라 중 근세 정신문황의 중심지의 하나였고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400년 줄기차게 이어온 항일구국 활동의 산실이었던 ‘학봉선생고택’이며, 그 주인공이 학봉 김성일선생과 선생의 장손인 단곡 김시추 선생, 선생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 선생, 13대 종손인 김용환 지사이다. 단곡 김시추 선생은 광해군 13년(1621년) 영남유림의 소추로 추대되어 오국의 원흉이며 패륜의 권신인 이이첨 일당의 죄과를 추상같이 단죄하는 ‘영남유생만인소’를 3소까지 올려------정묘호란시에는 안동의병대장으로, 병자호란 시에는 안동 유진장으로------김흥락선생은 전국최초의 항일의병인 안동갑오의병을 일으켰으며 을미의병과 병신의병을 총지휘하여 안동부를 점령........수천명의 후학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을 가르쳐 그 중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기암 이중업, 공산 송준필, 성제 권상익과 같은 걸출한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다.-----김용환 지사는 젊어서는 의병에 가담하여 경북지방의 무수한 의병전장을 누볐고, 학봉종가 전 재산과 임천서원의 재산을 포함하여 20여 만 평의 전답을 처분하여 종고종형인 만주의 석주 이상룡 서로군정서 총재에게 독립군 자금으로 헌납하고,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루는 등 네 번이나 구속되었으며.......

이 내용은 학봉으로부터 시작된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온 자랑스러운 집안 내력이다.

임천서원은 이러한 김성일의 정신을 높이 산 사림의 공의로 그를 단독 배향한 서원인데 조선시대 마지막 서원이기도 하다. 임천서원의 출발은 학봉이 타개한지 15년째 되던 해, 그의 출생지인 임하현의 서쪽에 고서당을 개조하여 위판을 봉안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원래 이름은 임천향사였고 이후, 11년에 걸친 확장으로 1618년(광해군10)에 서원으로 중건 작업을 완료했다.

임천향사를 서원으로 승격시켜 개원하기까지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학봉과 동문수학한 한강 정구였다. 한강이 선배인 학봉을 얼마나 숭모했는지는 그가 지은 김성일의 행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칠십 노구인 정구가 병석에서 붓을 들었다 놓기를 3년이나 반복하면서 무려 81장에 달하는 행장을 탈고했다. 이것은 기존의 행장이 통상 2~3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행장이라기 보단 전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행장이 완성된 것은 1617년이었는데 서원과 사묘를 세우고 봄 가을에 제향했으며 사묘는 존현사라 하고 서원은 임천서원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18년 중건 낙성 고유식이 행해진 이전에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사묘를 개건하고 위판을 다시 모시는 봉안문은 정경세가, 상향문은 김륵이, 존현사의 중건 상량문은 이준이 지었는데 정경세와 이준은 유성룡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그러나 개원 2년 만에 임천서원은 자진철거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황이 주벽으로 있는 여강서원에 위판이 이봉되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천서원과 마찬가지로 자진철거의 운명을 맞았던 병산서원이 1629년에 유성룡의 위패가 다시 봉안되자, 1655년(효종6) 김성일의 주향서원인 임천서원도 다시 복설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으나 원래의 임천서원 자리가 여강서원과 너무 가까이 있어 학고로 이건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후, 1716년(숙종 42년)에 이협이 학고 이전를 전제로 경상도 일원에 통문을 보냈으나 이때도 일이 마무리 되지 못했다.

1796년(정조 20) 1월 안동부의 숭보당에 유생 300여명이 모여 도회를 열고 원장에 이세윤, 영건도감에 김굉을 선출하여 복설 문제를 논의했으나 역시 이때도 이런저런 이유로 복설이 이뤄지지 못하다가 1826년 호유측 원로들이 청성서원에 모여 의논한 결과 학고는 너무 궁벽하여 석문정사 근처로 옮겨 복설하기로 합의했다. 1830년에 사빈서원에서 도회가 한 차례 열렸고, 1831년에 마침내 호암촌으로 장소가 결정되어 1832년 14칸의 주사 건물을 완성되었으나 1845년 다시 장소가 바뀌어 석문정사에서 5리쯤 떨어진 엄곡촌으로 옮겨 1846년 여름 16칸의 주사를 완성하였다.

1847년에는 강당이, 1849년에는 원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와 서재가 완성되어 학봉집의 판목을 옮겨 보관하였고, 1855년 드디어 묘우가 완성되어 서원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1856년(철종7) 4월에 위판을 봉안함으로서 장장 15년에 걸친 역사가 끝나고 자진철거 된지 240년 만에 복설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서원이 복설된 지 7년 만에 다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뒤, 1908년 사림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임천서원은 이처럼 1618년 서원으로 개원된 이래, 무려 290년 동안 두 번 훼철당하고 두 번 복설되는 진기한 기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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