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맞아 지식과 경륜 발휘해 나라를 구했다'
'국난 맞아 지식과 경륜 발휘해 나라를 구했다'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2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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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류성룡과 병산서원>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7]

류성룡과 병산서원

♦ 최성달 (작가)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서당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풍산을 지날 무렵, 난 중에도 유생들이 면학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사패지(호패와 땅)와 서책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유추한다면 어렵지 않게 병산서원의 전신인 풍악서당이 고려 때부터 풍산현에서 존속해 온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여러 기록들은 병산서원이 풍산 류씨들의 사학이었고 서애가 건립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애가 직접 지은 최초의 집은 그의 나이 34세 때 하회의 북촌 강기슭에 세운 다섯 칸짜리 당인 원지정사다. 그리고 선영이 있는 군위에 45세 때 건립한 남계서당인데 서애는 이때 남계서당과는 별도로 하회에 옥연서당을 완성시켰다.

물론 풍악서당의 경우도 서애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약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면서 면학하기가 곤란해졌을 때, 서애의 권유로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이름을 병산서당(1572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보면 오늘날 병산서원하면 서애가 먼저 떠오르게 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시초였을 것이다.

병산서원의 지세는 앞의 병산이 너무 높고 급하여 강물은 빨리 흐르고,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이 계속 밀려 내려가므로 이런 터에서는 재물이 쌓일 틈이 없어 살림집의 입지로는 부적합한 곳이다. 그러나 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 교육시설로는 안성맞춤의 터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서애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곳으로의 서당이전을 유림들에게 권유했을 것이다.

오늘날 병산서원은 강학의 공간인 입교당과 동재 서재 만대루로 구성되는 영역과 제향공간인 존덕사와 부속건물이 묘한 결합을 이룬 전당후묘(前堂後廟)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원래 강학공간만 있었으나 서애 사후 그의 애제자였던 우복 정경세 등 지방사림의 발의로 뒤편 산자락을 깎아 그의 위패를 봉안할 존덕사(1613년)가 건립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병산서원이 지방사학으로 발 돋음 한 계기가 바로 이때인데 당시 사액은 받지 못했지만 서당에서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안동지방의 대표적 서원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629년에는 사림의 공론으로 산림으로 있다가 징소되어 사헌부지평을 역임한 서애의 삼남인 유진이 종향되었고, 경쟁관계에 있었던 호계서원 보다 훨씬 늦은 시기인 1863년(철종14)에 사액을 받았지만 고종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될 수 있었던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병산서원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절경과 건축미다.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렸는데 아마 병산이 없었다면 이곳이 절승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푸른 병풍 같은 절벽을 의미하는 병산은 두보의 백제성루라는 시 내용을 인용하여 그렇게 지었다. 만대루에서 주변경관을 조망하면 화산을 등지고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7칸의 단순한 만대루의 기둥과 건물은 다양한 선의 연속에 의해 주변경관을 수직적으로 분절시키고 병산서원의 집합적 질서의 묘미를 집약하는 공간이다.

특히 입교당에서 바라보는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정형미를 외부의 자연경관과 연결시켜 수평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 때문에 만대루와 입교당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고건축, 특히 서원 건축양식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건축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성룡의 학문과 행적

유성룡은 1542년(중종37년) 황해도 관찰사였던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나 1607년(선조40)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생애는 풍전등화였던 조선의 운명과 겹쳐지고 연결되어 있다.

서애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1세에 예를 갖추어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평생 사표로 삼을만한 가르침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스승 이황은 서애에게 올바른 도리로써 앎과 행동의 근본을 다지는 공부를 주문했고, 이러한 충고는 전 생애에 걸쳐 서애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다. 23세에는 생원시에 합격을 했고, 이듬해에 성균관에 입교한 후 25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사로 벼슬길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애는 퇴계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관념론에 치우치기보다, 실용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치밀했다. 이러한 그의 유연한 사고는 스승 이황 생존 당시 학계의 주류를 형성했던 심성론이나 이기론의 논쟁적 분위기에 빠져들지 않은 태도에서도 감지된다. 서애의 학문적 자세는 본말과 함께 체용을 두루 갖추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본체는 있으나 쓰임이 없는 관념의 문제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그가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이러한 학문적 기풍이 있었기에 환란을 극복하는데 있어 그의 탁월한 능력이 발휘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학문의 폭은 가히 넓고도 넓다. 시문 경사 도학 의례 군사 의학 정치에 이르기까지 박학했으며 이를 실질적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특히 그는 완고한 유학자들의 관념론에 대해 서슴없이 비판을 했다. 문벌로 적을 칠 수 없다는 그의 사유는 노비라도 적의 목을 가져오면 벼슬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듯 경세가로서 일세를 풍미했다.

그의 이러한 해박한 지식과 경륜은 국난을 맞고서야 곳곳에서 빛을 발휘했다. 임란 7년의 극복은 그가 총 연출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임란에 대처한 그의 공적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전운이 감돌자 1년 전에 유능한 장수의 기질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권율과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발탁한 것일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임란의 최종 승리는 불가능 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서애의 사람을 바로보고 제대로 쓸 줄 아는 안목은 상당히 높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발발의 책임론에 묶여 파직된 채 서울로 압송되던 김성일을 적극 변호하여 명예회복의 기회를 준 것 또한 전란을 수습하는데 김성일과 같은 강직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그의 경륜은 탁월했다. 1591년(선조21) 봄에 당도한 왜국의 국서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쳐들어가겠으니 길을 열어 달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를 두고 영의정 이산해는 사사로이 왜국과 통했다는 책망을 기피하기 위해 숨기기를 청했으나 서애는 오히려 일본이 직접 명에 통보할 경우 조선의 처지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명에 통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서애의 주장은 당시 실질적으로 조선이 왜병을 인도하여 명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전파되어 명나라에 의심을 사고 있던 터여서 신뢰외교를 외친 그의 견해는 이후 조명전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현명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조25년 9월에 여진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원군을 자청했을 때, 서애는 안사의 난을 비유하며 “오랑캐의 속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좋은 말로 그들을 설득시켜 돌려보낸다는 조정 공론을 주도했다.” 서애가 보기에 여진족의 개입은 전쟁이 국제전의 성격을 띠고 또한,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모른다는 점에서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일행이 한양을 버리고 개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이 난국 타개책을 건의했을 때도 그의 판단력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세한 험준한 북도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8도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명나라에 망명해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서애는 선조를 향해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우리 땅에서 떠나시면 조선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 도가 여전하고 호남에서 충의의 선비들이 곧 봉기할 터인데 어찌 경솔하게 명나라에 내부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서애의 말처럼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난극복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그의 혜안과 경륜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애는 선조 24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4월13일에 임란이 발발하자 군정의 최고위직인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정치 군사 외교의 업무를 총괄했다. 7년 전쟁 발발 다음해인 1593년 10월부터 종전 무렵인 1598년 11월까지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병행하며 종횡무진 국난을 극복하는데 매진하여 조선이 최종 승리자가 되는데 1등으로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애는 57세 되던 해 낙향하여 6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 동안 후학양성과 저술에 몰두했다. 이 기간 중 스승인 이황의 행장을 기록한 ‘퇴계선생연보’와 풍산류씨의 가계인 ‘종천영모록’ 그리고 ‘징비록’을 저술했다.

유성룡의 고제인 우복 정경세는 다음과 같이 행장에 기록했다. “공은 ~~ 항상 경제의 일에 유의하였고 예악에 의한 교화 외에 군사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과 이재 등의 일을 자세하게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재주는 사무에 대응하기에 족하며, 학식은 쓰임을 다하기에 족하다.”

그의 부음이 서울에 전해지자 묵사동 옛집에 백성들이 몰려들어 “유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왜란 중 살아남지 못했다”고 호곡하는 이가 족히 1천은 되었다고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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