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이 창건하고 고운이 중창한 절'
'의상이 창건하고 고운이 중창한 절'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1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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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운사와 최치원>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1]

[고운사와 최치원]

고운사는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고운사가 위치한 등운산 줄기는 연꽃이 반쯤 피어있는 이른바 부용반개(芙蓉半開)의 형상으로 영남일원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1918년 오시온이 지은 고운사사적비에 연혁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당 의봉 원년에 의상국사께서 왕의 명을 받들어 여러 사찰들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다가)“등운산은 소문현의 북쪽에서 가장 웅장하고 봉우리와 계곡이 지극히 아릅답다”는 말을 하고 신문왕 원년인 681년 고운사(高雲寺)을 창건했다. 이어서 최문창공(최치원)이 여지 여사 두 분 스님과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세웠으며, 사찰이름도 그의 호를 따 고운사(孤雲寺)로 바꾸었다.

다른 기록도 있다. 1725년 (영조 5) 신유한이 지은 고운사사적비에는 고려건국 초에 운주화상이 계속해서 이곳을 중수하였으며, 송나라 천우선사가 더욱 새롭게 정비하였다. 또한 여말의 도선국사가 발원하여 석조약사여래불을 봉안하였으며 다층의 부도를 봉안하였다.

고운사의 연혁 중에 특이한 점은 17세기의 중창노력이다. 알다시피 17세기라면 주자학이 꽃을 피워 불교에 대한 배불의 경향이 극심한 시기였다. 때문에 1695년 진행된 대규모 불사는 불교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의 고운사는 1744년 어첨(御帖) 봉안각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하는 판사(判事)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회복했던 사세를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운사는 19세기에 들어와서 1803년, 1835년 두 차례에 걸쳐 화재가 발생하는 시련을 겪는다. 이후 고운사는 소실된 전각들을 중창하고 보수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는데 1902년 고종황제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황명으로 연수전을 건립한 것을 계기로 본산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했다. 현재 고운사는 70년대에 건물 일부가 소실되기도 했으나 1980년 근일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후, 옛 고금당선원 옆에 40평 규모의 선원을 신축하는 등 가람을 대규모로 중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의 내용은 고운사의 연혁인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 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대유 최치원이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고운사와 최치원의 관계를 말해주는 유일한 단서인데 유학자인 그가 사찰을 세웠다는 대목이 퍽이나 흥미롭다.

즉, 의상대사가 681년에 창건하고 최치원이 9세기 후반 무렵에 중창했다는 설인데 이 자료들이 편찬된 시기가 조선 후기라고 해도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현존하는 고운사 석조여래좌상(보물제246호)이 9세기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어 시대적으로도 최치원과 연관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가 불교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높았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유학자가 사찰을 지었다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을 터이다.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 사찰인 고운사를 중창하고,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했을 뿐더러, 만년에는 그곳에서 은거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904년(효공왕8)에는〈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도교에도 상당한 조예가 깊었음이 여러 기록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풍류도를 일으킨 원류이기도 하다. 풍류도란 신라 화랑들과 같이 산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연을 숭상하는 수행법이자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등운산의 이름도 뭉게구름을 뜻하고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허루나 우화루 역시 도교의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들을 뜻한다.

당대의 대 지성이요, 풍운아였던 최치원은 가야산에서 산신이 되었다는 설이 해올 정도로 신선도나 도교의 성인에 가까웠다. 아마, 최치원과 밀접한 인연을 직했기에 고운사는 도교적 이미지로 가득한 절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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