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상징 높아 병호시비 한가운데 서다'
'권위와 상징 높아 병호시비 한가운데 서다'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1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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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호계서원과 병호시비>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3]]

호계서원과 병호시비

여강서원(이후 호계서원)은 퇴계 이황을 봉안하고 선비를 기르기 위한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고자 1575년에 건립되었다. 안동시 월곡면 도곡동 여산촌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1973년 임하댐 유원지 내로 옮겨졌다. 원래 90칸의 건물규모를 자랑하는 안동의 대표적 수선서원(首善書院)으로 1676년 숙종 때 호계서원으로 사액을 받아 여강에서 호계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채 강당만 남아 있다.

여강서원이란 글씨는 정자(正字) 홍사제가, 위패 봉안 제문은 서애 류성룡이, 매년 춘추 중월과 중정일 향사 때 고하는 축문은 월천 조목이 지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제문]
“아! 퇴계 선생의 도는 높고 덕은 순전하여 청순한 기질로 혼자 천리를 터득하셨네. 정예한 학문은 오묘하게 전현과 계합되고 참된 앎을 역천하여 징분질욕하고 개과천선하며 만 가지 이치를 모두 하나의 진리로 귀일시켰으며 바다에서 흐르는 것 같도다.”

[축문]
“마음은 공안을 전해 받았고 도는 낙민을 계승했으니 정학이 창기하여 백대의 종사로다.”

호계서원을 이해하려면 병호시비가 무엇인지 먼저 파악해야 하고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세세한 내막을 알려면 당시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퇴계가 길러낸 제자는 대략 3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중 대표적인 제자가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월천 조목, 한강 정구다. 그런데 이 중 누구를 퇴계와 함께 배향할 것인가의 문제는 미묘하고도 중차대했다. 도산서원의 예에서 보듯 월천 조목만의 배향은 곧바로 퇴계 학파내의 갈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문중을 넘어 퇴계 학통의 적통을 가리는 제자들 간에 보이지 않은 대결구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때 영남 사림은 서애와 학봉을 배향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또한 문제가 되어 누구를 상석인 동쪽에 배향하느냐 하는 200년에 걸친 시비를 흔히 병호시비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병산서원과 임천서원에 각각 따로 배향되어 있던 위판을 옮겨 봉안할 때 순차의 다툼을 1차 병호시비라고 하고, 200년이 지난 순조 연간에 학봉 학파들이 사현승무소(1805년)에서 사현의 위차를 김성일-유성룡-정구-장현광 순으로 할 것을 주장한 것이 2차 병호시비의 발단이었다.

1차 병호시비의 특이한 점은 이미 배향되어 있는 위판을 다른 서원으로 옮겨 봉안하는 일이 그전까지는 전례가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학봉을 배향한 임천서원은 건립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위판을 호계서원으로 옮겨서 봉안한 탓에 강학과 배향 기능이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문제는 서애를 배향한 병산서원도 다를 바 없었다. 이처럼 위판까지 옮겨야 하는 미묘한 문제까지 겹친 1차 병호시비였지만 다툼은 의외로 쉽게 수그러들었다. 사림이 퇴계학파의 일을 주도적으로 맡아 처리하고 있던 우복 정경세에게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구했다. 이에 우복은 “나이의 차이는 견수(肩隋)에 미치지 못하나 벼슬의 차이는 절석(絶席)에 해당되니 아마도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고 하며 유성룡의 위판을 동쪽에 학봉의 위판을 서쪽에 배향하도록 했다.

학봉 측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조판서와 대제학, 왕자의 사부까지 지낸 국가의 원로인데다 영남학파의 거두인 우복의 결정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우복은 대표적인 서애의 제자였다. 학봉이 중앙무대에서만 활동한 탓에 후학을 기를 겨를이 없어 장흥효와 사위인 김영조 외에는 뚜렷한 제자가 없었던 반변, 서애는 상주목사 시절 우복 정경세, 이준, 이전 형제, 전식을 키웠고, 안동에서도 김봉조, 김응조 형제와 김윤사 형제를 길러 학봉보다 제자복이 많았다. 따라서 1차 병호시비에서 유성룡이 제자의 덕을 톡톡히 봤다면 2차 병호시비는 이것이 역전된 데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200년이 지난 후, 서애학파가 정경세의 뒤를 이를 만한 제자를 배출하지 못한 반면, 학봉파에서는 경당 장흥효 이후 이현일, 이재,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대학자를 배출함으로써 서애학파에 비해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학파적 우월감이 2차 병호시비의 근저에 깔려 있었다.

학봉-서애-한강-장현광 순으로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한 호유(학봉파)측의 주장은 곧바로 병유(서애파)측의 호계서원에 배향된 위차를 따라야 한다는 반박에 직면한다. 문묘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성균관 안에 공자와 신라시대 이후 최치원 등 거유들을 모신 조선 최고의 사당이다. 따라서 이곳에 배향된다는 것은 학자에게는 최고의 영예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양측의 주장을 골치아파하며 모두 기각해 버리는 바람에 문묘배향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호유와 병유 양측의 크고 작은 시비가 계속 이어졌지만 또 한 번의 큰 시비는 대산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합사하는 문제로 불거졌다. 대산은 그 벼슬이 영조 때 참의에 불과했으나 학문적으로는 일가를 이룩해 영남학파에서는 퇴계의 학맥을 잇는 적통으로 존숭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에 호유는 1812년 예안향교에서 도회를 열고 조정의 추인을 받기 위해 상소했으나 병유 측의 반대로 일을 매듭짓지 못했고, 1816년 재시도 역시 문묘가 좁아서 더 이상 신위를 모실 공간이 없다는 병유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200년간의 병호시비 중 가장 큰 파동은 묘우(廟宇)내의 위패 이동설로 생긴 양측의 분쟁이다. 이 문제는 관찰사가 개입되었다가 급기야 조정 내의 일로 불거져 일을 담당하고 처리했던 관리까지 파면되는 등 양측의 감정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되었다.

발단은 대산의 추향 논의가 청성서원에서 열렸던 다음날 병유 측에 투서가 날아들었는데 내용인 즉, 호계서원 묘우 내 위패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병유 측의 확인 결과 중앙에 있어야 할 위패가 북벽 밑으로 옮겨졌다는 주장이었고 호유측은 위패가 원래 북벽에 있었고 이는 수 백 년 동안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병유측은 이 문제를 경상도 관찰사인 김경노(추사 김정희의 부친)에게 제소했는데 소장을 받은 관찰사는 “묘위를 함부로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원위치로 되돌려 놓으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호유측은 병유측의 주장이 대산의 추향을 막으려는 빌미라고 보고 관찰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여 진위를 가리라고 주장했다. 관찰사는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사림의 분쟁에 관이 개입할 수 없다는 논지로 병호측에 내린 판결을 취소하고 뒤로 물러나 버렸다.

이후 문제는 더 복잡해졌는데 대산의 추향에 관한 논의가 도외(道外)로 번지자 호유는 일을 매듭짓고자 했고, 병유를 묘위 복원은 물론 대산의 추향까지 막아서는 방편으로 상소를 결정했다. 병유의 김종규는 1817년 왕이 선왕의 묘에 성묘하려 행차하는 틈을 타서 가전상소(駕前上疏)를 했고 이에 왕이 예조에 이 일의 처결을 맡겼다.

그런데 재정문(裁定文)이 병유의 주장을 받아들인 ‘경상도관찰사 김경노를 파견하여 쌍방 유생을 회유하여 위판을 원상태로 돌려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호유측은 위패를 언급한 부분에 대한 해석을 예조에 다시 의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회신의 내용은 왕에게 위판관계를 상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판을 원상태로 돌리라는 재정문은 누군가의 농간이거나 가필되었다는 답신이었다.

결론적으로 병호시비는 조정에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사소한 다툼처럼 보이는 이러한 시비의 속사정은 어느 쪽이 퇴계의 적통인지를 가리는 세력싸움이었기 때문에 쉽게 물러설 수가 없었다. 위차의 문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호계서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650개소가 넘는 서원들의 속사정은 독향서원을 제외한다면 적게는 두 명, 많게는 열 명이 넘게 배향되었던 탓에 이러한 다툼은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호계서원만이 영남유림 전체가 목숨을 걸고 양측으로 나눠 시비에 달려들었던 것은 그만큼 호계서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영남 사림이 가장 존숭하는 퇴계, 서애, 학봉이 나란히 배향된 탓에 상징성과 서원이 갖는 권위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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