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난 끝난 후 가족함께 조선에 남았다'
'임난 끝난 후 가족함께 조선에 남았다'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1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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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동산서원과 천만리>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2]

[동산서원과 천만리]

# 전경 1.

언제가 신문에서 마키아벨리 평전을 쓴 사람이 메디치가의 후손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은 당시 세력가(勢力家)였던 메디치가에 헌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4백년이 지나 그 후손이 마키아벨리의 평전을 쓰다니 실로 신묘한 역사적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전경 2.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도공 박평의는 ‘명자대도’의 예우를 받으면서 도오고(東鄕)라는 성을 쓰게 되었는데 그의 13세 후손인 박무덕은 일본의 외무대신이 되었다.

#전경3.
우록 김씨의 시조인 김충선의 일본명은 ‘사야가’다.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우선봉장으로 왜병 3천을 거느린 그는 조선에 당도하자 이렇게 말한다.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토지를 빼앗고 재물을 탐내어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은 병가에서 가장 금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다만, 진세를 바르게 하고 군기를 세우며 기운을 가다듬고 마음을 단속하여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라.”

그는 조선으로 귀화했고, 전란에 공을 세웠으며, 진주목사 장춘점의 따님인 인동장씨와 결혼을 하여 대구 인근의 우록동에 은거했다. 박정희 정부시절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은 그의 13세손이다.

#전경4.
전쟁(임진왜란)의 포화 속에 한 사나이가 구원병의 이름으로 조선 땅에 발을 딛는다. 직책은 조병영량사(調兵嶺糧使). 평양전투를 비롯하여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 전투에서 왜병을 크게 물리쳤다.

천만리. 영양천씨(潁陽千氏)이며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이다. 1543년[가정(嘉靖)-계묘(癸卯)] 8월 1일에 중국의 노(魯)나라 영양(潁陽)에서 시강원교관(侍講院敎官)을 지낸 아버지 천종악(千鍾嶽)과 어머니 전씨(錢氏)부인에게서 출생했다.

어머니가 멀리 떠나서 살 태몽을 꾸어 만난로정(萬難路程)의 뜻을 담아 만리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1550년 광원(廣原)귀양지에서 양억(楊檍)의 반란군과 싸우다가 호암의 절벽에서 전사하니 선생이 8세 때였다. 다음해에 어머니마저 죽어 공부상서(工部尙書)인 외숙부 전윤(錢倫) 밑에서 컸다.

1555년 2월. 황태자탄생축하특명시(皇太子誕生祝賀特命試)에 13세의 나이로 급제하였으나 연령 미달로 부름을 받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특별히 황제를 알현하여 광원(廣原)에 아버지 천종악(千鍾嶽)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우고 충의사(忠義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다음해에 영녕백(永寧佰) 허언(許彦)의 딸과 결혼하였다.

1571년에 무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1575년에 북방경비의 책임자인 북로총절사(北路總節使)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오부추장(五部酋長)으로 편성된 13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1천의 군사로 대적하여 이부추장(二部酋長)과 2만의 적을 물리쳤다. 이 공로로 다음해 2월에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의 중책을 맡았다. 1580년에 직패금(織貝錦)의 상소로 양릉(楊陵)에서 8년간을 귀양살이를 하고 1588년에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 겸 총독오군수(總督五軍帥)가 되었다.

천만리 선생의 운명을 뒤 바꾼 일대사건은 1592년에 시작되어 1598년까지 지속된 임진왜란이다. 임란은 선생의 운명만 뒤바꾼 것이 아니라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일본의 국가적 운명도 갈라놓았다. 임란 후, 명나라는 조선을 지원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국방력의 약화로 여진족에게 나라가 망한 것이다.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가 끝나고 도꾸가와 이예야스 막부 시대가 문을 열었다.

조선 또한 왕조는 이어갔지만 전국토가 황폐화되는 경제적 파탄을 겪어야 했다. 170만 결이던 농토는 54만 결로 줄어든 탓에 민간의 생활이 처참해져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격심한 격변기 속에 선생은 가문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임란이 끝난 후, 1598년 4월에 명나라 군대가 개선할 때 잔류부대 2만 병력을 지휘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남는다. 그리고 그해 9월, 명군의 완전 철수가 이뤄졌으나 선생은 귀국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그대로 머물렀다. 아마 전쟁터에 가족을 대동한 사실로 보아 출정하면서 이미 조선에 살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조선에 뿌리를 내리자 조정은 그를 임란1등 공신에 녹훈하고 자헌대부 봉조하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왕위를 계승한 광해군(9년)은 1617년 (光海君9-丁巳)의 유서(諭書)에『임란일등공신(壬亂一等功臣) 화산군(花山君)의 은덕과 공훈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니 이 나라가 그 충훈(忠勳)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고 토지 30결(結)과 돈 100냥과 승마 1필, 노복 1구를 하사했다. 이어 혹시 자손 중에 굶주림을 당하면 나라에서 구휼(救恤)할 것이고 후손을 높이 등용할 것이며 후히 대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이 뜻에 따라 1620년(光海君12-庚申)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의 교지가 내려지고 아들 상(祥)도 한성윤에 오른다.

#전경5.
1961년, 경북 안동시 용상동 1293번지에 천만리 선생을 모신 사당과 강당이 세워졌고 다음해 8월18일에 도내 유림회의가 열린다. 위판(位版)을 모시고 향례(享禮)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1962년 9월23일. 향중 유림회의에서 서원의 총호(摠號)를 동산서원(東山書院), 사당은 충장사(忠壯祠), 강당은 상의당(尙儀堂), 정문을 유정문(由正門)이라고 결정한다. 같은 해 10월26일 914명의 유림이 모여 첫 향례를 올리고 지금까지 매년 3월 중정일에 향사를 하고 있다.

중국의 장수가 조선 사림의 발의로 서원에 배향되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봉사하고 있으니 역사의 신묘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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