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 영주가는 길목에서 중생을 구제하다'
'안동에서 영주가는 길목에서 중생을 구제하다'
  • 최성달 (작가)
  • 승인 2015.05.20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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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연미사와 석수암>
[최성달의 儒佛 에세이 - 16]

연미사

♦ 최성달 (작가)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인 연미사는 안동시 이천동 산 2번지 오도산에 자리하고 있다. 오도산은 불상, 삼층석탑, 연자루, 소나무, 연미사 이 다섯 가지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미사를 흔히 제비원과 혼용하여 부르고 있는 것은 이 자리에 고려 때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소인 원(院)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의 역사 지리를 기록한 읍지인 영가지에는“연비원불사는 부의 12리 떨어진 오도산 남쪽에 있다. 큰 돌을 세워 불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0여장(丈)이다. 당나라 정관 8년(634)에 만들었으며 여섯 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다. 집 모양이 하늘에 날개를 펴는 듯하다. 뒤에 두 차례에 걸쳐 중창을 하였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 재목은 다 예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 기록을 참조하면 연미사는 신라 선덕왕 3년에 창건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석불상은 고려시대 양식을 대표하고 있어 이 둘 사이에 모순이 있다. 절의 명칭에 있어서도 단순히 연비원불사라고 한 것을 보면 영가지의 기록 연대인 1608년 당시에 이미 형체만 있고 폐사에 가까운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른 견해도 있다. 삼국유사 권제3‘보장봉로 보덕이암’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고승이었던 보덕선사에게는 11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명인대덕이 634년 불상을 새기고 연자루라는 전각을 세워 연구사를 창건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불상을 덮고 있는 전각이 제비 모양과 흡사하여 연자루라 하였고,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가 제비꼬리 쪽에 있어서 연미사라 불렀다. 연구사는 제비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대게 절집의 기록이란 상황이 비슷비슷하여 연혁을 추론하는데 상당한 애로가 있다. 그러나 최근세의 일은 비교적 소상이 남아 있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신중탱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다시 사찰이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이덕원의 시주로 중수되었고, 1934년 봉정사 신도들이 합심해서 대웅전과 주방을 짓고, 다시 1947년 칠성각을 지었다. 그러나 70년대초 무허가 건물 철거령에 따라 칠성각이 헐렸다. 1978년 지금의 대웅전을 증축하고, 1996년에 단청하였다.

몇 년 전부터는 사찰이 국도변에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 수행에 어려움을 겪자, 도로를 앞으로 옮기고, 중수 중건을 위한 연미사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었다. 경주 불국사, 청송 대전사, 대구 동화사 주지를 역임하고, 현재 영주 희방사에 주석하고 있는 설송 스님이 부산의 내원정사와 연계하여 이 사업이 진행했으나 지금은 주춤한 상태다.

연미사는 전국의 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와 함께 수험생 부모들이 자식의 입시 합격을 기원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석불상 앞에는 기도를 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이곳에 찾아와 기도를 한다고 한다. 아마도 제비원 미륵은 산신의 정기와 부처의 원력이 만나 소원을 성취하는 힘을 지닌 곳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전설에는 법당과 석불을 도선국사가 다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도선이 지녔다는 신통력에 기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제비원은 흔히‘성주의 본향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고 시작되는 성주풀이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것은 경상도 민요 성주풀이 1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1) 이 때문에 굿당에서 무당들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를 때도 이 노래가 원용이 되고 있다. 성주라는 것은 민간신앙에서 집집마다 그 집의 부귀영화와 평안을 지켜주는 신을 말한다. 그러한 신의 근본지로 여겨졌다는 것은 민간신앙의 기원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안동은 유교문화의 본고장이면서 민간신앙의 종지가 유지되고 있는 종향이기도 하다. 이 밖에‘연이처녀 전설’,‘이여송 전설’,‘석수장이 형제 전설’,‘제비원과 법룡사간 절짓기 시합 전설’, ‘제비가 된 목수와 욱바우골 전설’이 있다.

- 신중탱
1880년에 봉안된 신중탱은 세로 124cm, 가로68cm 크기로 조선후기 신중탱의 전형적 구도와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화기와 동일한 내용이 경기도 여주 목아불교박물관 소장의 영산회상도에도 있다. 조성 연도, 일월, 불사에 관계하였던 비구들의 이름까지도 일치하고 있다. 이 두 그림 모두 봉안된 사찰이름이 거재되어 있지 않고, 신중탱이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왔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두 그림 모두가 연미사에서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이천동 석불상
전형적인 고려시대 거구불상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1963년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자연 암벽에 신체의 선을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았는데 전체높이가 12.38m의 거대한 불상이다. 머리의 뒷부분은 대부분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는 소발이 높은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이마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으며 얼굴은 턱이 완만하게 처리되어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머리와 얼굴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 채색된 채 퇴락되었음을 볼 수 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 주름은 오른쪽에서 직선으로 흘러내린 옷자락과 서로 교차되도록 접혀있다. 양 손은 얕은 부조로 오른손은 배에 대고 왼손은 가슴에 장지와 엄지를 맞댄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인데 이러한 양식은 보물 93호로 지정된 경기도 파주군 용미리 석불상에서도 볼 수 있다.

-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화강석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 기단부와 신부의 비례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너져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언젠가 복원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과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어 단조로운 모습이며 옥개석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솟아올라 가벼움을 이끌어 내고 있다.

석수암

석수암은 안동에서 영주로 연결되는 5번 국도를 2km 정도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 백화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무착스님 이후, 2007년부터 안동 대원사, 의성 옥련사 주지를 역임한 정우스님이 현재 주석하고 있다. 석수암이란 명칭은 이곳이 예로부터 돌이 많고, 맑은 샘물이 바위틈으로 줄지 않고 흘러나와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석수암은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으나 그 뒤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현재 정면 1칸, 측면 1칸의 3량 가구인 산령각 옆 노천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므로 뒤에 이어지는 절의 역사를 추정할 따름이다.

- 대웅전

원래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의 전각이었으나 협소하여 1997년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증축했다. 맞배지붕에 주심포 익공계 공포를 지니고 있는 대웅전 외벽은 팔상성도가 채색되어 있고, 자연석으로 6단 계단을 놓아 법당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내부에는 'ㄷ'자로 이어진 닫집 아래에 천정은 기존 3칸 도리가 노출되어 있으나 증축한 2칸은 우물천정으로 마감했다. 불단은 동쪽에 설치되어 있으며, 인등단, 지장단, 영가단이 각각 마련되어 있고 채색하지 않은 수미단에는 사슴, 봉황, 연꽃 등의 상서로운 상징이 조각되어 있다.

불단에는 금동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좌우협시로 문수/보현보살상을 1995년도에 봉안했다. 또 좌측에는 청동지장보살좌상이 봉안돼 있는데 역시 같은 해 모셔 놓았다. 최근에는 오른쪽 벽면에 관음보살좌상을 비롯해 원불 1000기를 봉안해 놓았다.

삼존불의 후면에는 후불탱,신중탱, 동종,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지장탱은 고종21년인 1884년에 석수암에서 조성한 것이다. 그림을 그린 금어는 금주(金珠), 두환(斗煥), 혜명(慧明)스님이 그린 것으로 나와 있다. 이중 금주스님은 1890년 상주 남장사(南長寺)의 신중탱, 예천 명봉사(鳴鳳寺)의 현왕탱 조성에 참여한 화사(畵師)다.

- 산령각

산령각은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며 붉은 벽돌로 마감한 갑석 위에 자연석 주초석을 놓은 정면 측면 각 1칸씩의 주심포계 사모기둥으로 완성되어 있다.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산신탱이 1978년대 조성된 것으로 보아 대략 197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외벽에는 무량수전과 같은 기법으로 용, 호랑이, 동자상 등이 채색 없이 먹으로 그려져 있다.

내부에는 중앙의 칠성탱과 왼쪽의 독성탱, 오른쪽의 산신탱이 봉안돼 있는데 칠성탱과 독성탱은 2002년에 조성했으며 산신탱은1978년에 조성했다.

- 석조미륵보살좌상

산령각 바로 좌측 노천에 봉안된 석조미륵보살좌상은 1983년 관음전을 지을 때 출토된 것으로 발견 당시 이미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 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형태로도 전체적인 조성양식을 파악하는데 별 무리는 따르지 않는다.

상호는 약간 투박하나 원만한 편이며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불의(佛衣)를 표현했는데 왼쪽 어깨 뒤의 옷 주름은 양각으로 볼륨감을 주었고 오른쪽 어깨 주름은 음각으로 표현함으로써 차이를 둔 점은 다른 불상에서는 보기 드문 수법이다. 전체적인 조성 양식상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보여 진다.

-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자연석 기단에 막돌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주심포 양식의 공포를 지니고 있다. 외벽화는 채색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형태의 아름다운 보살상이 단순하지만 유려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정면에는 법당 크기와 반비례 할 정도로 자그마한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전면에 불단을 설치한 가운데 청동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협시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1995년도에 봉안했다. 삼존불의 후면에는 후불탱과 좌측에는 신중탱이 봉안돼 있다.


- 무량수전 주련

具足神通力:신통한 힘을 흡족하게 갖추시고
廣修智方便:널리 닦은 지혜 방편으로
十方諸國土:시방 세계 모든 국토에
無刹不現身:몸을 나타내지 않은 곳이 없도다.

- 향나무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향나무의 일종으로 나무 높이 12m, 지름 1m의 노거수이다. 전설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때 의상대사가 석수암을 처음 세우면서 심었다고 한지만 도선(道詵)이 석수암 창건 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수령은 400여년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가 바로 서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퍼지면서 자라는 모습이 특징이다.

나무의 가지가 나뉜 것인지 합쳐진 것인지 식별할 수 없는 독특한 수형을 이루고 있으므로 비록 향나무의 변종이나 생물학적 가치가 매우 커 품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95년 6월 30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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