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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를 통해 안동을 보다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7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13)
2017년 12월 07일 (목) 15:36:53 이미홍(경북기록문화연구원 운영위원) lmh3377@hanmail.net

‘얼음이 녹으면 농상이 시작되고 혼례를 치르면 사람의 일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진정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것은 혼인을 하면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혼례가 가지는 의미는 일상의 의례 중에서도 특별했고 중요했기에 혼례에 따르는 절차와 형식 또한 중요하게 여겼다. 그랬기에 혼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초례를 치르기까지의 모습들 속에는 그 지방, 그 마을, 양쪽 집안사람들의 문화와 일상이 그대로 녹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근현대를 지나면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양상을 달리해온 혼례문화와 안동사람들의 혼례를 따라가 보았다.

어릴 적 우리집 안방 한쪽 벽에는 매화나무에 작은 새 두 마리가 정겹게 마주보는 수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놓은 보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횃댓보였다. 그 옛날 시집오는 새색시들은 밥상보, 이불호청, 방석, 베개호청, 횃댓보 등을 수놓아서 가지고 왔는데, 횃댓보는 장롱이 없던 그 시절에 벽에 못을 박거나 줄을 처서 옷을 걸고 그 옷에 먼지가 앉지 못하도록 그 위에 가림개로 쓰였던 것으로 새신부의 바느질 솜씨를 내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흰 광목천을 도화지 삼아 예쁜 풀꽃과 작은 새들을 수놓아 벽에 걸었던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거실에 걸린 명화 그림 같은 역할도 했던 것이, 엄마가 새로 깨끗이 빨아 하얗게 풀을 먹인 횃댓보를 걸면 그 앞에서 내가 새와 꽃 그림을 한참을 쳐다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흰 천에 손 때 묻으면 안 된다고 만지지 못하게 했지만 나는 엄마가 없을 때 아래쪽에 수놓은 새와 작은 풀꽃을 손으로 만져보았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 횃댓보에는 혼인 생활에 대한 새색시였던 엄마의 꿈과 소망이 오롯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예의와 법도를 따랐던 깐깐한 안동사람들의 혼례

예의와 법도를 따르기로는 어디가도 빠지지 않는 안동 지방에서는 혼인말이 오가는 시점부터 조심하고 삼가며 허혼을 하고 날짜를 택일하고 혼서지를 주고받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예법에 맞추어 거치고서야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마당에 멍석 깔고 병풍을 치고 전통혼례식을 치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가마 타고 시집으로 신행길에 오르기 전 딸에게 당부와 걱정을 하는 친정어머니 모습. 사진 출처 :근대 100년.

혼인 전날 신랑집에서 혼인을 허락해 준 감사의 보답으로 채단(홍색, 청색 비단)등 신부용 혼수감과 혼서지 및 물목을 함에 담아 신부집에 보내는데 이를 납폐(納幣)라 한다. 이때 하인이나 심부름꾼(함진아비)을 사서 함을 보내던 것에서 점차 신랑이나 신랑 친구가 함을 지고 가는 것으로 풍습이 바뀌었다.

   
1956년 9월 27일 류희걸 심외생 결혼식. 류희걸 제공

전 안동민속박물관장을 지낸 류희걸 선생은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고등학생이던 1956년에 장가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장가를 들면 택호로 불리게 되는 일이 많았는데, 어린 나이에 장가들면 평생 불리게 될 택호에 민감했던 선생은 처음 혼삿말이 났던 재령 이씨 처가가 마꼴이란 말에 마꼴댁이라 불리기 싫어 그 혼사를 거절하고 청송 덕천에 심씨 문중에 장가를 들었다고 한다.

   
류희걸 선생이 혼례식을 마치고 그날 처음 상을 받고 있다. 류희걸 제공
   
류희걸 선생 장가든 날 양쪽 집안 어른들. 류희걸 제공
   
류희걸 선생 결혼식날 청송 신부집에 모인 일가친척들. 류희걸 제공

“내가 장남이라 어른들이 혼인을 서둘러서 조혼을 할 수 밖에 없었지. 안동농림학교 3학년 때인 병인년 9월 27일에 열여덟 살 나이로 심외생한테 장가갔지. 그때 안에서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열아홉이었는데, 혼인날 보니까 신부가 고왔지.”

안동에서부터 청송까지 장가들러 가서 하루 종일 식을 올리고 나니 배가 고팠던 기억과 열아홉 신부의 고왔던 얼굴이 생각난다고 한다.

축가와 축시, 축글이 있던 혼례식 풍경

철도청에서 근무했던 김성근 실버넷기자의 혼례식 사진에는 결혼을 축하하는 글을 두루마리에 길게 써서 혼례식날 읽은 흔적들이 보인다. 결혼축사를 적은 글이 많을수록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축하를 받은 결혼이라는 증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결혼 풍속도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 우인들이 축하하는 말이나 노래를 하는 것과도 맥락이 닿아 있는 장면이다. 김성근씨가 철도청에 근무한 까닭으로 보이는 신랑 지인들과 찍은 사진 속에 철도 동기들로 보이는 이들이 여럿 보인다. 사모관대와 대례복을 벗은 사진은 혼례청 위의 상 위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혼례가 끝나고 난 후로 보인다.

   
1957년 김성근의 혼례식. 신랑 신부 앞에 쌓인 결혼을 축하하는 두루마리들이 보인다. 김성근 제공
   
1957년 김성근이 혼례식이 끝난 후 신부와 친지들과 찍은 사진. 김성근 제공

혼서지는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혼인을 했다는 증서

혼인 전날 함진아비가 지고 온 함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물목일 경우가 많지만 기실 가장 핵심은 신랑 아버지가 사돈이 되는 신부 아버지에게 보내는, 청홍색 채단에 싸인 장성한 아들에게 귀한 따님을 배필로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담긴 혼서지다. 혼례과정에서 사돈끼리 주고받는 것으로 사돈지라고도 한다. 요즘은 한복을 맞추는 곳이나 웨딩플래너들이 혼서지까지 패키지로 다 마련을 해 주지만, 그전에는 혼례를 앞두고 사돈에게 보낼 혼서지라 마을에 글씨 잘 쓰는 어른한테 정성을 들여 부탁을 해서 받는 경우도 많았다. 해서 글 잘하는 어른이 있는 집에서는 혼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누구네 딸이 혼인말이 있고 누구네 아들이 언제 장가를 든다는 것을 제일 먼저 알기 마련이었다.

   

1938년 무인년 동짓달 이원길의 모친되는 삼산할매가 와룡면 삼산 구름재에서 오십리 길이 넘는 월천곡 고통마을로 시집올 때 가마 속 혼함에 품고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간직한 신랑 집에서 보낸 혼서

북후가 고향인 44년생 권혁조는 갑진년인 64년에 나이 스물 하나에 녹전면 서삼동 돌머들(이견리)에 살던 유옥연에게 장가를 들었다. 혼인 말이 나고 사주단자가 오고 갔고, 혼인하기 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상견례 겸 딱 한 번 처음으로 신랑될 이, 신부될 이의 얼굴을 봤다. 그날 두 사람이 시내 중앙사진관에서 약혼 기념사진 한 장 박고 구시장에 있던 덕천루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었다고 한다. 신랑은 양복 대신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장가들라고 하니 아버지 따라 신부 집으로 가서 장가를 들었지. 그때 장가들고 처가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북후 우리 집으로 왔지.”

장롱 서랍 맨 아래에 시집올 때 들고 온 그대로 고이 싸 놓았던 혼서지를 조심스레 풀어 보이면서 무심한 듯 말씀하신다.

   
장자 혁조의 배필로 귀한 따님을 맞이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혼례일 전에 신랑 권혁조의 부친 권오문이 사돈댁에 보낸 혼서지. 권혁조 제공

혼서는 예를 갖추어 혼인했다는 증거로 신부는 일생동안 이를 소중하게 간직했다. 혼서지를 꺼내어보면 안 되는 걸로 들어서 살면서 한 번도 꺼내어보지 않고 넣어둔 덕에 아직도 한지가 빛바래지 않고 정갈한 그대로인 혼서지가 우리 어른들이 어떻게 혼인을 중히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걸 열어볼 생각도 안 했고, 열어보면 백년해로 못 한다고 알아서 깊숙이 넣어놓고 간수만 했지. 한 번 결혼하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만 되는 줄 아는 세상을 우리는 살았지 뭐.”

엄동설한 마당에 차린 혼례청에 묵이 올라왔다고 한다. 새신랑에게 그 묵을 뒤집어 보라고 해서 신랑의 지혜로움을 보기 위한 것으로 안동지방에 내려오는 풍습이었는데, 다행히 미리 들은 바가 있어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혼인날이 동짓날이었는데 친정 살다가 다음해 10월 16일에 시집으로 왔지. 결혼한 날이 아버님 생신날이라 우리는 결혼기념일도 모르고 살았어. 처녀 때는 고생도 모르고 지내다가 결혼식 하고 친정에서 일 년 정도 있으면서 살림 배워서 온 거지. 시집에 와 보니 장남이라 층층시하 시어른들 모시고 사는 것은 당연하지만, 오고 나서 얼마 안 돼 신랑은 군대 가고, 시조부모님에다 다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시어머니하고 시동생들 건사하며 살았지”

신식결혼식과 예식장

6.25를 전후하면서 신식 결혼식이 조금씩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삶도 팍팍해져갔고 전후의 곤궁한 살림살이도 한 몫을 해서 마을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치르던 마을잔치였던 전통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안동 도심 지역에서는 예식장에서 하는 신식결혼이 혼례풍속의 주류가 되어갔다.

   

60년대 중반 예안면에서 전통결혼식을 올린 임옥순의 언니는 옛날식 대례복 대신 치마저고리에 족두리를 썼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결혼은 19세기 말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들어왔다. 처음에는 예배당 결혼식이라고 하여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신랑은 후록코트 혹은 모닝코트에 모자를 썼고, 신부는 면사포에 흰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고무신을 신었다. 신부의 예복은 우리식에 서양식을 합친 모양이었다. 서양의 결혼식을 흉내 내어 신랑과 신부 옆에 남자 둘, 여자 둘 들러리를 세웠고 그리고 어린아이 들러리 둘을 앞에 세웠다. 들러리는 신랑, 신부와 나이가 비슷한 총각과 처녀라야 했고 신랑 쪽 들러리는 신랑과 같은 모닝코트를 입었고, 신부 쪽 들러리는 면사포를 안 쓰고 흰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지금의 서양 결혼식의 모습과 흡사하다.

   
자매의 사진을 제공한 임옥순은 69년에 안동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이나 외지로 나가 신문물을 접하거나 신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있는 집에서나 돈 깨나 있는 집일수록 신식결혼을 선호하였다. 여기에 웨딩스레스를 입고 하얀 면사포를 쓰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들의 로망도 한 몫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변해가는 혼례문화가 우리 지역에서 반드시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사고가 지역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마을 사람 전체가 함께 했던 잔치이기도 했던 전통결혼에 비해 서양식 결혼은 사람들이 마음을 나누는 자리라기보다 결혼을 한다는 것을 통보하는 형식적인 행사라고 여전히 전통혼례를 고집하는 집들도 있었다. 허례허식의 폐단도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고 지역민들의 삶의 형태들도 전통을 지키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식장 결혼식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안동예식장이 문을 열다

1960년, 안동에도 서양식 건물의 안동예식장이 문을 열었다. 일찍부터 안동의 민속과 문화를 전파하는데 관심이 많아서 안동 민속 문화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류한상 씨가 하회에서 안동으로 나오면서 안동예식장을 지어 문을 연 것이다.

   
안동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 류한상 제공
   
결혼식 때 주례를 서고 있는 류한상 선생. 류한상 제공

예식장을 운영한 것에 대해 류한상 선생은

“사람들이 점점 집에서 잔치를 치르고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이 힘들어진 시대가 된 거지요. 그래서 신도들이 교회나 성당에서 식을 올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일반인들도 넓은 장소를 빌려서 혼례식을 치르게 되면서, 주위에서 안동에도 예식장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해서 예식장을 하게 된 거지요. 내가 맨날 문화 관련 일만 쫓아다니고 하니까 생계를 위해서 시작한 면도 있지요. 예식장을 하면서도 나는 별로 한 일도 없어요.”라고 하실 뿐이었다.

권복랑 할머니, 혼인할 인연은 따로 있었다

주례를 서 줄 사람을 못 찾은 신랑 신부의 주례를 류한상 선생이 맡아 주곤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닭실에서 두루종가로 시집 온 권복랑 할머니도 다섯째인 막내아들의 주례를 류한상 선생이 서 주었다고 한다.

“그분하고는 처녀 적에 잠깐 혼인 말이 오간 적이 있는데, 누이 되는 이가 닭실로 혼인해 와서 나를 보고 닭실에 처자가 있다고 해서 하회 집에 말을 해서 하회에서 혼인말이 건네 왔어. 아버지가 봉성 면장을 지내고 있으실 때였는데, 아버지는 보낼 마음이 있으셨는데, 그런데 어매가 어려운 자리라고 말리셨어. 인연은 따로 있어서, 다른 데도 혼인말이 더러 있었지만 나는 얼마 후에 두루로 시집왔고 그리고 그분은 광산 김씨 처녀한테 장가를 들었지.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혼인말이 오고 갔던 게 다인 70년도 더 전인 스물 몇 살, 열 몇 살 적 이야기래. 우리 아들이 마침 안동예식장에서 결혼을 하는데 사돈댁에서 우리 쪽에서 주례를 세우라 해서 걱정을 했더니, 신시장에서 포목점을 하는 하회댁이 류선생한테 부탁을 해줬어. 내가 신시장 포목점에서 바느질감을 받아와서 바느질로 아이들을 키웠거든. 신랑 신부 한복도 짓고 이불보도 수놓고 혼수 예단감 바느질도 수타 했어. 류 선생이 주례 끝내고 안 혼주인 내가 닭실서 왔다는 것을 듣고는 누님 생각을 해서 그랬는지 와서 인사를 정중히 하고 가더라고”

그 시절 안동 사람들의 혼삿말이 어떻게 오고갔는지, 그리고 혼사가 어떻게 맺어지고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동예식장 미용실의 원장(왼쪽)과 류한상 선생 부인. 류한상 제공
   
안동예식장 입구. 아이가 앉아 있는 벽 뒤로 신랑신부 대기실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류한상 제공
   
안동시 도시재생센터 간판이 걸린 안동예식장 건물

현재 안동시에서 매입하여 리모델링을 하여 도시재생센터로 문을 연 안동예식장 건물은 당시 자금이 넉넉지 않았던 류한상 선생이 건축을 전공한 친구들에게 디자인 보다는 튼튼하게 지어달라고 부탁해서 지은 건물로, 몇 년 전까지도 건축학도들이 지나가다가 보고 전국에서도 보기 드물게 튼튼하게 지어진 근대건물이라고 구경을 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안동예식장에 이어 중앙예식장이 생겨나고 뒤이어 금성예식장도 문을 열었다. 그리고 YMCA나 로타리회관, 농협회관에서 예식을 올리는 이들도 많았다. 젊은이들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때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일이 당연하던 시절이었고, 우리 지역에 예식장이 몇 개가 생길만큼 젊은이들 수도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다. 삼포 세대니 오포 세대니 하는 말이 회자될 만큼 취직도 결혼도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고 젊은이들의 숫자도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져 가고 있다.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저하게 그 수가 줄어든 우리 지역의 예식장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웨딩업체들의 등장과 일반예식장보다 호텔식 결혼을 선호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높아진 눈높이만큼 결혼식 비용도 점점 높아지는 현실도 있다.

포목점 골목 사람들이 말하는 혼례

혼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포목점 골목이다. 혼인 날짜가 정해지면 바빠지는 건 집안의 아녀자들이다. 이때 신부 어머니 되는 이가 제일 먼저 찾는 곳은 포목점 골목이었다. 안동 중앙시장의 포목점 골목은 시장이 문을 연 이래로 오랫동안 안동을 비롯한 인근 북부지역 사람들이 혼수를 장만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다.

   
중앙시장 포목점 골목을 지키고 있는 금정주단 이동식 사장

포목점 골목 안 금정주단 이동식 사장은 부친(이수락, 작고)이 일제시대 때부터 장사를 시작해 포목점이 생기던 초창기부터 장사를 시작한 것을 후에 이어받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취재고 뭐고 할 것도 없다시면서도 오랫동안 포목점 골목을 지키셨던 부친 이야기를 하셨다.

“부친이 장사를 오래 하셨지요. 부친 돌아가시고는 어머니와 안사람이 맡아서 장사를 했고 저는 한 게 별로 없어요. 근래에 와서 같이 도와서 하면서, 교대로 이렇게 가게를 지키고 있기도 하고 그러지요. 포목점 장사가 전보다 못하기도 하지만 이제 장사를 그만둘 나이도 되었다 싶어서 내년쯤에는 가게를 접으려고 해요"

   
중앙시장 포목점 골목 화성포목

70년대 후반부터 포목점 골목에서 장사를 했다는 화성 포목점 사장은 혼수를 장만하러 온 어머니들에게서 혼례가 얼마나 중한 일인지를 새삼 배웠다고 한다.

“그전에는 결혼식 날을 잡아 놓고 혼수를 하려고 안어른들이 아침 일찍 배에 보자기로 전대를 차고 와요. 전대를 차고 와서 그 때 돈으로 한복 혼수가 다 하면 백만원 남짓하거나 좀 안되는데 그렇게 차고 온 천 원짜리를 포목점 방바닥에 열장씩, 열장씩 한 방에 쭉 나누어 깔아요. 물목에 따라 돈을 그렇게 몽개로 나누어서 그걸 또 근봉을 해달라고 해요. 사돈댁에 갈 거라고 따로 실끈으로 일일이 근봉을 해서 몫을 지우는 거지요. 그때 보면 어른들이 근봉을 하려고 수숫대를 가지고 와요.

그 어른들이 수숫대 그걸 가지고 와서 명주실 같은 걸로 혼수를 근봉을 해서 물목을 다 적어요. 하나하나 물목을 다 적어서 수숫대를 위에 놓고 근봉을 써가지고 갔어요. 옛날에는 진짜 혼수를 하러 오시는 분들을 보면 그 부모가 정성과 혼을 다 담아서 혼수마다 일일이 그렇게 근봉을 했어요. 어른들이 아무쪼록 시집가서 잘 살도록 해달라고 정말로 기도를 하면서 근봉을 하더라고요. 나는 혼수를 준비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그 어른들에게 그렇게 다 배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정성은 그만두고 옷을 한 벌 신랑 신부 것을 해 입으려고 와도 조심하고 정성을 들이는 사람들이 적다. 웨딩드레스는 몇 번을 입어보고 시간을 두고 고르면서도 한복은 그냥 한 번 둘러보고 대충 고르는 사람도 많다.

“젊은 사람들은 혼례복도 전통한복 보다는 개량 디자인이 예쁘고 실용적이라고 가미된 것을 많이 고르고요. 개량한복도 이쁜 것도 많고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우리 전통한복의 원형을 지켜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보니까 안타깝죠. 신랑 신부가 혼례를 올리는 그날만이라도 전통 한복을 입고 그 의미를 지켜갔으면 싶어요”

함에 혼인예물 물목을 넣어보내다

다음은 하회마을에 전해오는 하회로 딸을 시집보내는 권씨 가문에서 작성한 혼인예물로 보낸 옷가지 목록인 의건물목이다. 치마와 저고리와 바지, 두루마기 목록에 들어갔을 정성과 그 옷가지들을 일일이 바느질하는 모습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권씨 가문에서 함에 넣어 보낸 혼인예물로 보낸 의건 물목. 출처 풍산류씨지산고택. 류한욱 제공

-북쪽에서 생산된 베로 지은 도포, 푸른 모시 도포, 흰모시 도포, 옥양목 큰 두루마기, 명주 겹두루마기, 가는 무명 겹두루마기, 옥양목 겹두루마기, 옥양목 두루마기 두 벌, 흰모시 두루마기, 버드나무 녹색명주저고리, 옥색명주저고리, 흑색명주저고리, 양누비 겹저고리, 가는 무명 적삼, 옥양목 적삼, 가는 비단 두꺼운 바지, 가는 무명 두꺼운 바지, 양누비 겹바지, 가는 무명 홑바지, 옥양목 홑바지, 학을 수놓은 토수, 색깔 있는 띠, 가는 무명 푸른색 큰이불 한 채.

다음으로 혼인예물로 보낸 술과 안주, 반찬꺼리와 과일 목록이다. 그 물목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씨 가문에서 함에 넣어 보낸 혼인예물로 보낸 음식 물목. 출처 풍산류씨지산고택. 류한욱 제공

-엿 한 상자, 산자 한 상자, 소주 한 병, 약주 한 병, 청주 한 병, 녹각 한 부분, 소갈비 한 부분, 돼지 반 마리, 북어 두 쾌, 넙치 한 두름, 방어 한 마리, 상어 한 마리, 조기 열 마리, 고등어 열 마리, 대구 한 마리, 문어 한 다리, 마른 가오리 한 마리, 오징어 열 마리, 대구포 한 마리, 산 꿩 한 수, 지백 두 되, 호도 두 되, 대추 두 되, 청배 오십 개, 건시 한 첩, 밀감 이십 개.

위의 혼수 물목을 보면 옛날에는 혼수의 반 이상이 이불과 옷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댁 식구들과 혼인 날 올 손님들에게 대접할 술과 안주, 과일을 챙겨 보내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결혼의 정표로 가락지를 나누어 끼던 것에서 점차 반지와 시계 등 고가의 보석이 혼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금은방 골목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금오당 사장님

   

금은방 골목의 터주대감 금오당 김인식 사장

금오당 김인식 사장님은 풍천 구담이 고향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한테 동몽선습까지 한문 공부를 배웠다. 당시에는 중학교를 못 나와도 동몽선습이나 명심보감 까지만 해도 시골 면사무소 면서기로 들어갈 수가 있던 시절이라 같이 학교 공부 배우던 친구는 면서기로 들어갔다. 김인식 사장은 면서기 자리가 났지만 들어가는 대신 대처로 돈 벌러 가는 길을 택했다.

“넓은 데로 간다고 서울로 가서 내가 금세공을 배웠어. 그때 보석 세공 학원이 서울에서도 딱 한군데 있었는데 남대문 시경찰국 건너편에 건물 5층에 보면 명보학원이라고 있었어. 거기서 세공하는 것부터 배워서 명동 금은방에서 일 좀 하다가 춘천 가서 세공소 하다가 그곳 세공소를 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안동으로 온 거지. 그때 18금이 유행이라 18금 세공도 새로 배우고 안동 내려와서도 순금 세공도 계속해서 새로 더 배우고 해서 세공도 직접 하고, 내가 의성 김가라 문중 일도 열심히 봉사하고 하면서 단골들도 많이 생겨서 문중이나 집안에 혼사나 큰 일이 있으면 믿고 일체 주문을 하고 해서 장사가 잘 됐지. 그때 신랑 시계는 세이카나 카르텍스가 잘 나갔지. 신부 예물도 딸을 데리고 와서 안어른들이 다 알아서 했지. 이제는 다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로 나가서 하고, 어른들이 자식들을 못 이기니까 자식들이 알아서 하는 경우도 많고 해서 혼수 예물로 큰돈은 못 번다고 봐야지.”

이렇게 금은방들이 들어선 거리가 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서 형성이 되었는데 그때가 금은방 골목의 호시절이었다고 한다.

“내가 세공을 할 줄 아니까 밑에 기술자들 한두 사람 들이고, 그 밑에 배우는 직원 두어 명 두고 세공소를 했지. 안동에 와서도 처음에는 직원 두고 세공소를 하다가 이 자리에서 금오당 금은방을 시작해서 오늘까지 한 거지. 그전에는 금은방이 한 여섯, 일곱 집쯤 있었고 몇 집 없었어. 그때 내가 여기 금오당 시작할 때 있던 가게들 중에 지금도 하는 곳이 남방시계점이 있고 나머지는 그 뒤 하나 둘씩 생겨난 거지”

금오당도 남방시계점도 이제는 옛날의 영광을 뒤로하고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 갈 길을 묻고 있다.

   
전통혼례식 전통혼례를 올리는 장면. 안동문화원 제공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식 풍경은 또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부모 세대와의 조율 속에서 아직까지도 대세는 웨딩홀이나 호텔에서의 예식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결혼 준비과정에서 예비 신혼부부가 알아서 결정하는 부분이 점점 커지고 복잡한 결혼준비 과정 일체를 전문 웨딩대행업체에 맡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비용이 많이 드는 형식적인 결혼식을 올리는 대신, 예식장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의미 있는 색다른 장소에서 예식을 치르거나 혼인 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올릴 비용으로 기부를 하거나 아프리카로 봉사여행을 가는 식으로 자신들만의 결혼을 기념하는 커플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랑 신부가 초례청 앞에서 맞절을 하며 혼인의 의미를 되새기는 전통혼례가 오히려 더 특별한 결혼식이 되기도 한다. 인생의 새로운 관문인 혼인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치르기보다 좀 더 의미 있는 결혼식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앞으로 결혼식의 풍경은 형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개성 있고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변해갈 것이라고 본다.

   
퇴계선생 편지 퇴계선생이 장가드는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 출처:선조유묵 가서. 이태원 제공

어제의 모든 의식을 어떻게 치렀느냐? “공경스럽게 그대를 배필로 맞이하여 우리 가문을 이으려고 하노니, 힘써 공경하여 돌아가신 어머님 뒤를 이을지어다.”이렇게 말하는 것이 상례인데, 대답은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 어찌 명하신 바를 어기리까?” 하는 것이 혼례식에서 하는 말인데, 너도 들은 바 있느냐? 천만 번 조심하여라. 대저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비록 지극히 친하고 가깝더라도 지극히 바르게 대해야 하고,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이치를 잊어버리고 무관하게만 대하다가 드디어 함부로 대하고 멸시하기를 끝없이 하니, 모두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는 데서 원인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집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 시작부터 삼가야 할 것이다. 천만번 조심하고 조심하여라.

경신년에 손자 안도가 20세에 당시 안동부사로 있던 권 소의 딸에게 장가를 들 때, 퇴계선생이 혼인하는 손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형식에 관계없이 혼인하는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라 혼례 기행의 말미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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