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간다
봄날이 간다
  • 정순임
  • 승인 2011.05.03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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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봄소식과 햇살바라기, 그리고 연애편지

#1, 봄소식
아주 오래된 혼자 사랑을 만났습니다. 옆자리에 조용히 앉은 그는 가만히 모은 양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습니다. 그 손을 잡아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몸짓도 섞지 않고 그냥 그 아름다운 손을 한번만 잡아 보고 싶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사랑을 만나면 언제나 갈망하게 되는 일입니다. 만찬의 시간, 우연이었을까요? 또 내 옆에 자리를 잡은 그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한마디 말도 없이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한번쯤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사랑을 만나면 한번쯤 꾸게 되는 꿈입니다.

봄이 오고 있던 어느 날 한나절 내 곁에 있었던 그 사람의 기억들이 조용히 향기가 됩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비록 나만의 자작극이었더라도 사랑은 잊히지 않을 모양입니다. 내가 내어준 마음의 방에서 그렇게 영원히 살려나 봅니다. 며칠, 오래된 짝사랑의 미명에 갇혀 있던 정신을 깨우고 이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서만 죽도록 혼자서만 되뇌이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살포시 손을 잡고 말을 건네도 좋을 내 사람 하나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대상없는 질문을 해봅니다.

#2. 햇살바라기
봄이라고 작은 화분 몇 개 베란다 창가에 내어 놓았습니다. 오늘처럼 일이 많아 어깨가 무너져 내리는 날 가만히 다가가 그 아이에게 말을 붙여봅니다. 그런데 그 아인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심지어 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 아이의 목과 손은 모두 창밖으로만 향해있습니다. 햇님이 저를 두고 숨어버린 시간에도 오로지 그 아이는 햇살만을 바라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울-컥 목젖을 타고 아린 무언가 한 웅큼 넘어옵니다. 내 마음이 무언가를 따라 돌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과연 지금도 나는 누구를 바라기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생각이 달립니다.

어깃장 놓는 사춘기 소년처럼 봄 밤 싸늘한 바람 한줄기 그 아이를 흔듭니다. 깜짝 놀라 베란다 창문을 닫습니다. 그래도 그 아인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몸을 돌려 세우지도 않습니다. 햇살과 사랑에 빠진 그 녀석이 얄미워 내 쪽으로 화-락 잡아 돌리고는 어줍잖은 내 질투가 한심해 웃음이 납니다. 진즉에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돌려세워도 그 아인 아침이면 햇살을 따라 또 반대로 몸을 누이리란 것을.........내가 졌습니다. 아무리 꿈꾸어 봐도 난 마음자락 바투어 바라기할 어느 곳도 가지지 못했으니.......지 사랑을 따라 마음을 다하려면 목이 마를테니 그 아이에게 물 한 잔 건넵니다.

#3. 연애편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메일을 확인했더니 3년 넘게 연락이 없던, 서로 전화번호가 여러 번 바뀌어 연락을 할 수도 없던, 선배한테서 메일이 와 있습니다. ‘올 겨울은 너무 추웠다. 오래간만이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잘 지내지? 마니 보고 싶다.’ 내용은 그게 전부입니다. 바로 답장을 썼습니다. ‘형이니? 내가 아는 형 맞니? 도대체 뭐하느라 연락도 안 한거야? 딱 거기 있어 만나면 때려줄라니까. 어쨌든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멜 보는 대로 전화해. 한시라도 빨리해야 죄질이 가벼워질거야 알지? 나도 보고 싶어.’ 답장이 더 깁니다.

다음날 전화벨이 울립니다. 한참 밀린 이야기를 쏟아 냅니다. “내가 대학 때 너 만난 이후로 60kg 안 되는 여자는 여자로 안보는 거 알지?” 선배의 말에 빵 터져 데굴데굴 웃습니다. 날씬하고 이쁜 여자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알지만 모르는 척 속아줍니다. 오래된 인연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그들 땜에 삽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거실 먼지들이 속살을 모두 드러낸 시간, 청소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자왔숑! 문자왔숑! 전화기가 숨이 가쁩니다. ‘햇살이 참 따스하게 느껴지네. 식사 거르지 마라.’ 그저께는 추웠던 날이 따뜻해졌다는 문자에 감사하며 무심히 연애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오래된 인연들이 있어 나는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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