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고 계시죠?” 옛사랑이 보내온 서신
“잘 지내고 계시죠?” 옛사랑이 보내온 서신
  • 유응오 불교투데이 편집장
  • 승인 2009.01.22 2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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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인다르마 -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레터>

아름다운 눈밭으로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

찰나가 영원에 닿나니, 기억이 있어 생은 영원하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레터>다. 

등반 사고로 죽은 후지이 이츠키의 두 번째 추모식 날,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와타나베 히로코는 이츠키의 집에서 그의 오타루 옛 주소를 발견한다.

그녀는 그리움 때문에 그곳으로 편지를 보낸다. 며칠 뒤 히로코는 예기치 못한 이츠키의 답장을 받게 된다. 히로코는 호기심에 오타루를 방문하고, 이츠키가 자신의 죽은 연인과 이름이 같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히로코는 이츠키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찾아가지만 집 앞에서 서성이다 편지 한 통만을 남기고 발길을 돌린다. 이츠키는 히로코가 남긴 편지를 받고서 ‘그녀의 연인’이 바로 자신의 중학교 동창생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히로코는 죽은 연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들을 이츠키에게 적어 보내 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이츠키는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을 추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던 유쾌하지 못한 기억에서 시작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점차 소중한 추억으로 미화되어 진한 그리움으로 변해가게 된다.

히로코는 이츠키가 숨을 거둔 산에 올라가 자신이 잡아 두려했던 이츠키를 마음으로부터 떠나보내게 된다. 그리고, 히로코는 죽은 이츠키에게 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동봉해 다시 보낸다.

“후지이 이츠키 님, 이 추억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히 당신을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어서 다행입니다.”

편지를 받은 이츠키에게 할아버지가 정원의 나무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츠키라고 한다. 너와 같은 이름. 네가 태어났을 저 나무를 심었단다. 그래서 둘에게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지. 너와 저 나무들에게 말야.”

정원의 나무의 바라보는 이츠키의 시선은 그윽하다. ‘이츠키’라는 나무를 바라보는 이츠키는 ‘이츠키’라는 풋풋한 옛사랑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이츠키는 중학교 후배 도서부원들이 가져온 도서 카드의 뒷면에 이츠키가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카드가 꽂혀 있는 책은 다름 아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프루스트는 『르네 브롬, 베르나르 그라쎄, 루이 블렁에의 서간집』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상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옛날의 어떤 냄새를 맡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도취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들을 상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득 고인의 낡은 장갑 한 짝을 보기라도 하면, 우리는 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일종의 은총, 무의식적 추억이라고 하는 한 묶음의 꽃다발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은 히로코와 이츠키라는 캐릭터를 한 배우에게 맡김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는 여정을 매우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은 ‘현전하는 시간’ 속에서 깃들어 있는 것처럼, 죽은 ‘이츠키’는 ‘히로코’와 다른 ‘이츠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수밖에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동일한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불가역성은 시간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기억이란 이름으로 흘러간 시간을 되돌린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아이작 뉴턴이 주장한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년 전의 일을 기억할 때 10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또한 10년 전의 기억이 하루 전의 기억보다 흐릿하지도 않다. 이는 인간에게 시간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불교에서는 시간의 상반된 개념을 설명할 때 겁(劫)과 찰나(刹那)라는 말을 쓴다. 겁은 ‘Kalpa’를 음역한 말이다. 겁을 설명할 때 곧잘 개자겁(芥子劫)이나 반석겁(盤石劫)을 예로 든다. 개자겁은 한 변이 1유순(100리에 해당)이 되는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그 것을 100년에 1개씩 꺼내서 다 없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반석겁은 한 변이 1유순이나 되는 입방체의 바위를 100년에 한 번씩 날아온 학이 날개를 스쳐서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이처럼 장구한 시간의 겁이 80번이나 흘러야 대겁(大劫)이 되고, 대겁을 아승지로 곱해야 아승지겁(阿僧祗劫)이 된다. 아승지란 일, 십, 백, 천, 만, 하고 세어서 60번째에 해당하는 수위명(數位名)이다. 그런가 하면, 찰나는 75분의 1초에 해당하는 극히 짧은 순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화엄사상에서는 일념이 곧 무량겁과 같다고 말하는 것일까? 일념은 찰나와 같고, 무량겁은 아승지겁과 같을진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시간이란 일정한 수치(數値)로 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의 시간에 비교한다면 한 사람의 생애는 하루살이와도 같다. 존재의 유한함을 극복하는 길은 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롯이 존재한다면 그의 육신은 가고 없어도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유한한 삶을 무한히 존속시키는 것이 바로 기억(記憶)인 것이다.  

이 글은 필자의 저서〈영화, 불교와 만나다〉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유응오 기자는 1972년 충남 부여 출생이며, 대전대 정치외교학과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불교신문>, 2007년 <한국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됐다. 2007년 신정아의 박사 학위가 조작됐다는 것을 최초로 보도해 한국불교기자협회 대상인〈선원빈기자상〉을, 2005년 영화를 불교사상으로 해석한〈시네마 서방정토〉기획기사를 연재해 한국불교기자협회〈특별상〉을 수상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10.27 법난을 역사적으로 규명한 [10.27 법난의 진실](화남출판사, 2005)을 펴냈으며, 이 시대 대표 스님 18인의 출가기를 엮은 [이번 생은 망했다](도서출판 샘터, 2007)를 엮었다. 공저로는 외국인 스님들의 출가.수행기를 묶은 [벽안출가](도서출판 샘터, 2008)와 콩트집 [초중딩도 뿔났다](화남출판사, 2008)가 있다. 현재 인터넷신문 <불교투데이>[http://www.bulgyotoday.com ]편집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불교투데이에 연재되고 있는  '시네마인다르마' 를 저자가 경북in뉴스의 뉴스연대 취지에 동의해 2차 게재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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