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안동국시(1) 정작 안동에는 안동국시가 없다고 하는데?
기획-안동국시(1) 정작 안동에는 안동국시가 없다고 하는데?
  • 유경상 기자
  • 승인 2023.11.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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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국시 한 그릇에 담긴 안동문화 이야기

안동문화권에서는 국수를 '국시'로 부른다. 그러니 안동국수도 안동국시로 부른다는 말이다.

[기록창고 19호] 기획특집으로 다룬 3편의 원고를 게재한다.

안동국시(1), (2)는 연결된 글이다. 원고량이 많이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 주]                                                                            

2002년 대구에 계신 어머니가 안동에 잠깐 다니러 왔을 때다. 점심때라 간단하게 국수를 먹자고 해 평소 발걸음을 따라 모 식당에 들렀다. 국수 사발이 나왔을 때 얼굴 인상이 묘해지더니 국물을 맛보고선 야야~ 이게 뭔 맛이로, 니맛 내맛도 없이 밍밍한게 내 입에는 아이다고 젓가락으로 국수가락을 휘휘 저었다. 고등학교 시절 맛보기 시작한 대안극장 앞 신선우동에 대한 모자(母子) 간의 평가는 이리도 달라져 있었다.

나 또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자취생활을 시작한 1982년이던 그때 이곳 식당 국물과 면발에 대해 입맛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십여 년 안동살이를 하며 내 입맛이 안동인들을 따라 변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칼국수를 칼국시라고 부르며, 점심때면 스스럼없이 찾아들던 식당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신시장 건너 영호초등학교 입구 길가에 낯모를 주인 할매가 끓여주던 칼국수는 싸고 푸짐하고 맛이 있었다. 조밥과 배추쌈을 곁들인 한 상이 3천원이었다. 안동군청 옆(이후 웅부공원) ‘선미식당은 안동식 칼국수를 오랫동안 음미하게 이끌었던 단골 식당이었다. 먼저 조밥 반그릇과 쌈을 내온다. 배추, 상추, 실파를 담은 채소를 손바닥에 올려 몇 쌈을 먹고 나면 뜨끈한 국시가 바로 나왔다. 늘 배가 고프던 시절에 국시만 먹으며 허기진다고 여겨서일까, 조밥이 없으며 안동국시가 아니라고 단정 짓는 분이 많았다.

옥동신시가지가 형성된 2000년대 이후 옥동손국수를 자주 드나들었다. 이후 동부교회 옆으로 이전했지만 안동사람들은 귀신처럼 그 식당을 찾아가 젓가락으로 집으면 툭툭 끊어지는 면발을 잘 건져 먹었다.

사장님, 이런 국물 맛은 어에 내니껴?”

멸치국물입니다. 너무 큰 건 맛없고 손으로 집어 까서 먹는 그 멸치 있잖니껴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 한 지 몇 년째냐 묻자, 이십일 년 됐다고 한다.

50대 중반 나이의 우리 세대가 상가거리 식당에서 맛본 안동의 국시 맛은 1980년 이후 부터이다. 언론, 지자체 홍보물을 통해 보고 듣는 진짜배기 안동국시는 훨씬 그 이전의 맛, 그 원형을 찾는 노력이 가미되며 시작된 셈이다. 그 즈음 혹자는 안동에는 안동국시가 없고 서울에 안동국시가 있다고 강변했다. 그렇다면 안동국시는 타 지역 국수와 무엇이 달라 그리도 요란했던가 궁금해진다. 그 줄기를 더듬으며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음식여행기가 될 것 같다.

수졸당 윤은숙 종부가 홍두깨로 민 반죽을 접고 접어서 최대한 가늘게 총총 썰고 있다. ⓒ최미연
수졸당 윤은숙 종부가 홍두깨로 민 반죽을 접고 접어서 최대한 가늘게 총총 썰고 있다. ⓒ최미연

가느다란 면 가락에 얽힌 인류의 문명사

누들로드(Noodle Road) 다큐멘터리 6부작 포스터 ⓒKBS

먼저 기억 속 흥미로운 영상물 하나를 떠올렸다. 십여 년이 지났지만 다시 관람하고 싶었다. 구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제목은 누들로드’(Noodle Road)이다. 2008KBS에서 제작한 국수에 관한 6부작 시리즈이다. 내친김에 책을 찾아 펼쳤다. 이욱정 PD<누들로드> 책 부제가 ‘3천 년을 살아남은 기묘한 음식, 국수의 길을 따라가다인데 기묘하다는 단어에 눈길이 더 닿았다. “우리의 식탁을 보면 과거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미래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가 보인다가느다란 면 가락에서 인류문명사를 풀어내기 위한 시도의 결과물인 이 책을 보니 흥미가 배가된다.

이욱정 PD는 책 프롤로그를 통해 20056, 런던의 누들바에서 정통 일본식 라멘을 먹게 된 경험을 들려준다. 음식에 관한 세계 최고의 보수주의자인 영국인들이 이런 아시아 누들을 먹기 위해 서툰 젓가락을 잡고 있는 장면 또한 기괴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국수가 처음 등장한 때는 언제일까? 어디에서, 누가 처음 국수를 만들었을까? 왜 그들은 국수라는 기묘한 모양의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1년간 관련 자료를 찾았고 기나긴 누들로드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편, 누들로드 영상에 소개되는 바람에 안동의 <수졸당 종택> 건진국수가 꽤 유명세를 타게 된다. 방송을 탄다는 건 사람들의 기존 관념을 바꾸거나 보태는 저력이 있다. 그 후에도 수졸당 건진국수는 방송과 신문에서 단골 메뉴처럼 다뤄지게 되었다. 지난 81(음력 615) 유두절을 맞아 수졸당에서는 유두천신(流頭薦新) 제사상을 차렸고 현장에는 언론인들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수졸당의 제사음식 중 건진국수는 해마다 뉴스의 소재로 자리를 잡았다.

누들로드 제작팀이 한강 이남의 면, 칼로 썬 밀국수중 안동의 종택을 찾은 이유는 전통적인 국수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두천신을 지내는 유두절 풍속은 신라시대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두천신 제사상에는 쌀을 수확하기 전 유두절 무렵에 거두는 참외, 수박 같은 햇과일과 햇밀로 만든 국수 등이 올랐다. 지금은 한반도에서 유두천신을 지내는 풍속이 단절됐다. 유두절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13세기 고려 명종 때 김극기(문장가이자 학자)가 쓴 <김거사집 金居士集>“615일을 유두절이라 하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액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고 기록했다. 물론 유두절 역사가 오래됐다고 유두천신 제사상에 올리는 국수가 오래됐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140여 년 전 수졸당 제사 장부에 국수 기록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곡물 반죽의 가능성을 탐구한 문화권은 어디일까

그럼 누들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음식과 요리>의 저자 해럴드 맥기(Harold McGee)는 곡물 반죽으로 만든 음식 중 파스타가 가장 인기 높은 음식인 건 확실하다며 파스타는 이탈리아어로 반죽이란 뜻이라고 했다. 누들은 파스타와 같은 요리를 부르는 독일어에서 왔고 이탈리아식 이외의 파스타와 유사한 요리를 통칭하는 것이라며, 끓인 곡물 반죽의 가능성을 철저히 탐구한 문화권 두 곳을 이탈리아와 중국으로 보았다.

그는 중국이 단백질 함량이 낮은 연질 밀가루로 단순하고 기다란 국수와 내용을 싸는 얇은 피를 만드는데 집중했다면서, 손으로 때리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면을 만들었다고 치켜세웠다. 만들어진 면은 바로 익혔고 매끈하고 부드러운 면을 묽은 국물에 말아서 식탁에 바로 올려졌다고 분석한다. 300년 무렵 중국의 수시(Shu Xi)가 지은 밀로 만든 음식()에 바치는 시(중국 고대의 만두와 국수)를 인용했다.

                                              

밀가루를 체에 두 번 거르니 / 하야 눈 같은 가루가 날리네.

쭉쭉 늘어나는 끈끈한 반죽을 / 물이나 육수로 반죽하니 반짝반짝 윤이 나네.

()

불 위에 물을 끓일 준비를 하고 / 김이 오르기를 기다리네.

우리는 옷을 끌어올리고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반죽을 치대고, 모양을 만들고, 표면을 고르고, 반죽을 늘리네.

마침내 손에서 떨어진 반죽은 / 손바닥 밑에서 사방으로 멋지게 펼쳐지고

서두르거나 수선 떨지 않고 쉼 없이 / 별이 갈라지고 싸락눈이 떨어지네.

바구니에는 속이 흩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있네. 병을 만들고 나면 남는 반죽은 없네.

아름답게 일렬로 늘어선 / 속 하나 터지지 않은 섬세하고 얇은 만두피.

부풀어 오른 만두피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지네.

봄날의 명주실처럼 부드럽고 / 가을날의 비단처럼 하얀 병이 알맞게 쪄졌네.

자연현상을 비유시키며 세밀하게 묘사한 이 시를 읽으면 저절로 침샘이 솟아 오르게 만드는 예찬 노래임에 틀림없다. 중국에서 국수와 만두는 원래 북부 상류층이 즐기던 사치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만두는 여전히 부자를 상징하는 음식이었지만 점차 서민들의 주식이 되었고 12세기에는 남부까지 펴졌다. 지리적으로 중국 문명과 끈끈한 관계를 가진 한반도에 중국의 국수문화가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은 크다고 보여 진다.

2018년 국립민속박물관은 면(麵)을 매개로 한 근현대시기 식생활의 변화양상을 조망하기 위해 전국에 걸친 국수 조사를 시작하여『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국수와 밀면』보고서를 발간했다. ⓒ국립민속박물관
2018년 국립민속박물관은 면(麵)을 매개로 한 근현대시기 식생활의 변화양상을 조망하기 위해 전국에 걸친 국수 조사를 시작하여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국수와 밀면』 보고서를 발간했다. ⓒ국립민속박물관

 

한반도에서 밀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재배한 것으로 추정한다. 평남 대동군 미림리에서 발견된 밀은 BC 200-100년경의 것으로 보고 있고, 경주의 반월성지, 부여의 부소산 백제 군량창고의 유적에서도 밀이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밀은 생산량이 적어 매우 귀한 식재료에 속했다고 한다. 밀 농사에 적합한 토질과 환경 조건을 갖춘 지역이 평안도, 함경도 일부에 불과했고, 그조차 쌀과 보리에 이은 부작물로 밀을 재배했다. 밀은 쉽게 접하기 어렵고 밀가루는 더욱 귀했기 때문에 특별한 날에만 사용한 것으로 여겼다.

우리 역사 문헌에 면()에 관한 기록은 <고려도경 高麗圖經><고려사 高麗史>에 등장한다. 고려는 중국 송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다. 누들로드 제작팀은 송나라 때 국수문화를 완성했다며 북송시대 수도인 허난성 카이펑의 도시 번화가를 소개했다.

송나라 이전 도시들은 정치·군사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한 고대형 도시였지만, 송나라는 개방적인 도시로 무역과 장사가 발달하였다. 수도인 카이펑 도시 규모가 인구 150만 명(당시 이스탄불 인구 40, 런던 인구 10만 명)이었고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외식문화가 발달하게 되어 음식점과 상점이 즐비해졌다. 이 전후시기에 밀가루 음식을 일컫는 병()에서 면()이 완전히 독립해 국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국수가 가장 인기 있는 메뉴인 대중음식으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 다양한 종류도 한몫을 했을 수 있다. 암생연양면, 세물료기자, 동피면, 냉동기자, 흘달, 동피숙회면, 혼돈, 채면, 호접면 등 다양한 이름의 국수가 등장한다. 국수의 대중화로 젓가락 사용이 많아졌다는 것도 소개한다.

그래서인가, <고려도경> 향음(鄕飮) 조에는 나라 안에 밀()이 적어 모두 상인이 중국의 산동지역으로부터 사들이니, () 가격이 대단히 비싸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 했다. 궤식(饋食) 조에는 사신이 고려 경내로 들어오면 식사를 제공하는데, 이때 음식은 10여 종으로 면식(麵食)을 우선하는데, 해물은 더욱 진기하였다고 했다.

<고려사>에서도 면과 관련된 내용으로는 성종이 최승로(927~989)의 장례에 부의로 보냈다는 300이 언급되며, 권세가에 선물을 보내는 것에 은, , , 면이 많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또한 <주자가례>에 따라 대부, , 서인의 제사에 면 1()를 올렸다는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 국수와 관련된 밀가루 음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는 밀가루와 면이 잔치와 같은 특별한 날이나 행사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규보(1168~1241)<동국이상국집>을 보면, 그가 아이를 낳은 지 칠 일에 손님을 맞이하며 지은 시에 고명한 세 학사가 너의 탕병(湯餠)의 손님이 되었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탕병은 국수인데 아기 출생 3일째 친척과 친지들이 모여 국수를 먹으며 축하했다는 것이다. 이색(1328~1396)<목은집>에서도 적제촌 안에서 밀을 처음 수확하니 향기로운 백면이 번드르하네라는 구절은 흰 국수 또는 밀국수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시대 문헌에도 밀가루와 국수를 뜻하는 면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국수는 주로 생일, 혼례, 회갑연, 제사 등 통과의례에 필요한 음식으로 쓰였다. 조선왕조에서 궁중연회를 베풀 때 그 준비 절차와 내용을 수록한 <진찬의궤><진연의궤>에서 “1719~1902년 사이 17, 1827~1902년 사이에 13회에 국수장국이 빠짐없이 쓰였을 뿐만 아니라, 1848년부터 따로 건면을 큰상에 놓고 있다며 국가 잔치에 국수가 널리 사용됐다고 한다. 이용기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에서 국수는 여러가지 잔치에 쓰이고 조반이나 점심 등 쓰이지 않은 데가 없다. 사람을 대접할 때 국수 대접은 밥 대접보다 낮게 여기므로 편육 한 접시라도 놓는 것이 좋다고 할 정도로 20세기 초까지 민간의 잔치 음식으로 널리 쓰이게 된다.

안동시 지원으로 발간된 책 속에서 ‘국시’는 안동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히고 있다. ⓒ안동최고 33선(도서출판 판)
안동시 지원으로 발간된 책 속에서 ‘국시’는 안동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히고 있다. ⓒ안동최고 33선(도서출판 판)

근대화·산업화 거치며 향토음식이라는 담론 형성

한국음식과 관련해 매스미디어에 칼럼을 많이 쓴 이규태(1933~2006)는 우리나라 국수 종류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고 소개했다. 한국음식의 특색을 여러 갈래로 설명해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했던 그는 우리에게는 칡뿌리국수·수수국수·감자국수·마국수·물쑥(天花)국수·()국수·백합국수·꽃국수·진주국수 등이 있었다고 열거했다. 국수 종류를 읽으려면 숨이 찰 정도이다. 그는 <고려사><고려도감>를 참고하며 국수가 고급음식이요, 제사 때 주로 쓰며 절간에서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을 언급한다. 고려 때 국수문화가 발달한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국수 만드는 방법이 본질적으로 다르고 또 국수 만드는 재료가 중국보다 월등하게 다양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 나름의 찬란한 국수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싶다고 했다.

문헌적으로 볼 때 안동문화권의 옛 요리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조선시대 음식 조리서에 봉제사 접빈객을 위한 면() 요리가 나온다. 16세기 김유(金綏, 1491~1555)<수운잡방 需雲雜方>에는 육면(肉麵) 이외에 습면(濕麵)을 만드는 방법이 소개된다.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한글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1670)에는 면으로 메밀국수가 적혀있다. 여기엔 세면법과 착면법이 나오는데, 세면법으로는 녹말과 밀가루로 실국수 만드는 법, 착면법으로는 녹두국수 만드는 방법이 등장한다. 그런데 국수를 만드는 주재료는 메밀가루와 녹두가루가 쓰이고 밀가루는 대부분 부재료로 쓰이고 있다. 밀가루를 가리키는 낱말에 접두사 ’()을 붙인 것은 이 시기에 밀 재배가 일반화되지 않아서 밀가루가 상당히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근대시대 음식은 대개 전통음식이라 부르고 있다. 근대화와 산업화, 서구화를 거치며 지역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통음식을 향토음식으로 부르게 된다. 1970년대부터 산업화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도시집중화 등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발생했고, 중앙에 대비되는 지방 향토음식이라는 새로운 담론도 생산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자리를 잡은 출향인들이 급증하던 이때부터 전통음식은 향토음식이라는 이름의 대중소비용 상품으로 재가공되었다. 즉 전통음식의 상품화가 본격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수도권에서의 전통음식 상품화는 거꾸로 고향에 머물렀던 원주민들의 음식에 대한 인식 틀을 크게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서울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한 출향인들은 출신지 고향을 자신의 뿌리로 생각하며 자아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생활했고, 이들 중 일부가 향토음식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식당을 열게 된다. 안동 전통음식이자 향토음식인 안동국시를 대중적인 메뉴로 전환하는데 앞장선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서울에 막 정착을 시작한 출향인들이 안동문화권이 음식과 관련해 독특한 색채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먼저 눈치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식당을 개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어릴 적 고향에서 맛보았던 음식을 어느 날 식당에서 발견한 출향인들이 입소문을 내었고, 언론은 이를 음식 스토리와 함께 뉴스콘텐츠로 포장해 냈다.

이에 지금이라도 신문 검색을 하면 쉽게 안동국시와 관련한 다양한 상호와 함께 관련한 기사를 접할 수 있다. 1969년 박정희 정부가 분식장려운동을 독려하던 때 서울 성북동에서 안동 출신 이옥만 씨가 국시집을 열었다. 그는 고인이 됐지만 딸 이수자 씨가 가업을 승계해 운영하고 있다. 또한 <소호정 안동국시>를 검색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기사가 뜬다. 소호정은 신문에 가장 많이 소개된 안동국시 체인점이다. 안동 출신 김남숙 씨가 1985년 압구정동에서 10평 공간으로 개업한 소호정은 언론을 통해 ‘YS칼국수로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탔고 현재는 2세 경영으로 양재동 본점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17개 지점을 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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