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오랜 갈망이 우리에게
성주풀이 문화 태동시켰을 것"
"집에 대한 오랜 갈망이 우리에게
성주풀이 문화 태동시켰을 것"
  •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 승인 2015.01.0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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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성주풀이에 얽인 나의 인생 별곡 (6)>

성주굿을 할 때, ‘성주의 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 이라는 성주풀이를 노래한다. 이렇듯 예로부터 안동 제비원은 민족신앙의 본향으로 일컬어져 왔다. 최근 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보존회 송옥순 회장은 2012년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전국최초로 완창하는 공연을 성공시켰다. 성주신앙의 체계적인 보존과 계승은 물론이고 현대인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송옥순 여사. 전통문화 유산을 온몸으로 계승·체현하고 있는 인간 송옥순의 삶의 이력을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의 기획으로 최성달 작가가 구술 받고 정리해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9.소나무와 미륵불

제비원이 성주의 본향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마 단언컨대 누가 보아도 인정할만한 낙락장송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회마을 만세송이나 백운정 게호송, 도산서원 주변 노송, 북후면 신전리의 김삿갓송에 버금가거나 그러한 소나무를 넘어서는 소나무 숲이 제비원 일대에 무성하게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성주신이 그 소나무를 보고 자신의 본향으로 삼았다는 데서도 알 수가 있다.

특히 안동에 소나무 지명이 많은 것은 이 같은 유래와 연원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안동의 4송천이라고 하는 솔뫼, 이송천, 송천, 송현을 두고 하는 말도 안동에 소나무가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부분은 미륵불이 제비원의 얼굴이긴 하지만 이곳이 민속신앙의 성지가 된 것이 미륵불이 주가 아니라 소나무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내 견해로는 성주의 본이 제비원이라는 성주풀이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데는 이러한 배경에다 용한 무당의 능력도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아마 성주풀이가 뿌리를 내리는 데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옛날 안동(제비원) 출신 무당의 구성진 성주풀이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말은 안동이 민속신앙의 경향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시점 또한 추론해 보건대 제비원이라는 지명의 연원이 말해주듯 원이라는 여관 제도가 처음 시행되었던 고려시대에 성주풀이가 자리를 잡아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전에 집에 대한 가신신앙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본격적인 대중화는 이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내가 굿을 하러 전국을 다녀보면 다른 지역에서 성주굿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는 데 그들은 하나 같이 안동 제비원 상주풀이에 연원을 두고 각자 자신의 주술무가나 서사무가를 구술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성주굿을 하면서 성주풀이를 하면 유심히 듣거나 때론 물어보기도 했다. 내가 안동 출신 무당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인데 지금도 성주굿이나 성주풀이의 경우는 다른 지역 무당들이 안동 지역 무당의 영향을 받는다.

필시 그들은 내가 하는 성주굿과 성주풀이를 유심히 보아 두었다가 자신이 성주굿을 할 때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안동제비원성주풀이는 아직도 타 지역 무당에게 영향을 준다.

굳이 우선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지만 미륵불의 조성도 이러한 소나무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나를 처음 제비원으로 인도한 친할머니도 소나무 때문에 미륵불이 생겼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윽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성주신앙에서 말하는 바가 그대로 현실에서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동은 알다시피 전국 고택의 30%가 몰려 있는 곳이다. 다른 지역 같으면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었을 법한 오래된 한옥이 수두룩하다. 소나무의 본향, 성주신과 목수신의 본향다운 현실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 새삼 놀라울 지경이다.


10. 안동제비원성주풀이

안동제비원 일대는 민속신앙의 성지다. 성주풀이는 전국 어디서 행해지든 성주의 본을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지고 공자가 태어나 유교의 종지를 맨 처음 설파한 중국의 곡부가 유교문화의 메카이듯, 안동제비원 일대는 민속신앙의 성지라는 것을 의미하고 뒷받침해주는 근거다. 어느 민족이든 신앙 없는 민족이 없든 우리민족의 신앙 발상지가 제비원 일대인 것이다.

나는 성서가 신의 재림을 바라는 인간의 갈망이 1천년 간의 결집으로 거대한 신의 역사를 써내려갔듯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또한 오랜 세월 집에 대한 우리민족의 바람이 성주풀이라는 문화현상을 태동시켰다고 믿고 있다.

아주 먼날 한 사람이 신탁을 받아 만 사람의 갈망을 채우려는 굿을 했을 것이고 계속해서 이러한 골계에 살이 붙어져 지금의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비롯한 전국 방방곳곳의 성주풀이가 탄생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함의가 갖고 있는 문화적 상징성이 엄청나다고 믿고 있다. 신화란 신성이 확립되어 가는 과정 즉 신성현현을 서사무가로 표현한 것인 만큼 안동제비원성주풀이 속에는 성주신이 언제 어떻게 인간과 지상에 강림하여 인간 군상들과 어울리며 지상적 삶을 영위해 나갔는지가 소상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 불완전한 인간이 그것을 극복하려는 믿음으로 우주와 세계에 물음을 던지고 답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안동제비원성주풀이 속에는 인간의 경험세계를 벗어난 고차원적인 세계에 대한 인간의식의 발현 즉 인간의 신앙적 고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안동제비원성주풀이는 성주신이 천신 계열임을 말해주고 있다. 천상에서의 잘못으로 지상으로 하강하여 고난의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신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성주신이 고난 속에 맨 처음 인간에게 집짓는 방법을 알려준다.

안동제비원성주풀이에는 집 짓는 과정이 소상하게 피력되어 있다. 제대로 된 나무를 골라서 집을 짓고 집을 지은 연후에는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안녕과 복을 빌고 있다. 성주신이 집의 수호신이고 목수의 신이 된 내력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는 데 이것은 한편으로 성주신의 신성이 가능케 한 원리와 인간에게 전파되어서 신앙의 대상으로 위상을 확립한 과정에 대한 소상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사무가 성주풀이는 성주신이 절대적 권능과 권위로 인간들에게 숭배 받으며 이 땅에 정착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에 한국 신화의 무속원리를 밝히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무당에 입무하는 내림굿은 이곳 제비원에서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제비원 석불 맞은편 산자락에는 그 옛날부터 내려오던 당산(무당의 산이라 뜻)이 있다. 당산은 전국 무당들에게도 꽤 알려진 편인데 이곳에 예로부터 유명한 범무당산이라는 굿당과 큰 바위와 신목이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범우당산(굿당)은 불이 나서 소실이 되고 현재 그 자리에 조립식 굿당이 차려져 있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이곳에 처음 갔을 때 범무당산에는 제비처녀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모셔져 있었다. 전설에 이 제비처녀가 일부러 굶주림에 죽어가는 범의 먹이가 된 육신공양 이야기가 전해진다. 옮겨보면 이렇다.

연미사 공양간에서 일하는 제비처녀의 꿈에 하루는 산신령이 나타나 당산에 올라가 보라고 말했다. 그곳 큰 바위 밑에 호랑이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으니 살리라는 것이었다.

꿈이었지만 산신령의 말이 생시처럼 들려 제비처녀는 스님에게 당산에 나물하러 간다는 말을 하고 그 길로 산신령이 점지한 당산 큰 바위 밑에 가보니 정말 소만한 호랑이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었다.

제비처녀는 죽어가는 호랑이를 보니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대로 만약 호랑이가 죽으면 제비원 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전멸한다는 산신령의 엄명 때문에 제비처녀는 앞이 아득해졌다. 당시 전국에는 돌림병이 돌고 있었고 벌써 인근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호랑이를 살릴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호랑이도 불쌍하고 마을 사람들도 걱정이 되었지만 가녀린 제비처녀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마을로 되돌아가서 먹이를 구해오자니 그 시간에 호랑이는 죽을 것이고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의 손으로 먹이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제비처녀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순간 혼절한 것인데 어느 순간 깨어보니 호랑이가 자신의 젖을 빨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처녀인 자신의 젓 무덤에서 유액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젖을 먹고 호랑이가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호랑이는 일어설 만큼의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호랑이는 제비원에 닥친 액운을 미리 막아줄 마을 수호신이었다.

“그래 내가 너의 먹이가 되어줄게. 나를 잡아먹고 호랑아 너도 해탈해.”

제비처녀는 자신이 호랑이의 밥이 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범의 아가리를 벌리고는 자신의 머리를 호랑이의 입 속으로 들이밀었다. 죽어가던 호랑이는 제비처녀를 먹고는 기운을 회복했다. 그 길로 제비원 길목에 나가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 때문에 제비원은 전국적인 돌림병에도 죽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생기지 않았다.

범무당산이라는 어원도 범이 처녀를 물고 갔기 때문에 굿당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처녀는 죽어서 당산의 산신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뒷날 그 처녀의 육신공양을 기려 범무당산을 지었다.


나는 매년 성주굿을 할 때마다 먼저 이곳 당산에 가서 기도를 한 후 산신과 성주신의 허락을 받아서 성주굿을 해오고 있다. 이곳을 성역화하려면 당산을 제대로 복원하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대대로 이 땅에 내려오던 민족 신앙의 측면에서 제비원 미륵불과 소나무와 당산은 삼위일체다. 어느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하고서는 전승의 근원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언한다면 집을 짓는 목수라면 적어도 자신의 근원은 알아야 하기에 집을 짓기 전에 이곳에 와서 먼저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집을 기공 혹은 상량하거나 완공을 한 연후에는 반드시 성주풀이를 하는 옛날 방식의 문화가 맥맥히 이어져가기를 소원해 본다. 그전에 우리는 집을 지을 때도 성주풀이를 했지만 이사를 가는 경우에도 성주풀이를 했다. 이처럼 성주신은 그냥 강림하지 않는다. 반드시 모시는 정성이 있어야 강신하는 신이다.

나는 앞에서 기술했듯 제비원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되었다. 무당이 되고 나서 성주굿을 배운 연후에는 매년 수차례 이곳 제비원에 와서 기도드리고 성주풀이를 해 오고 있다. 나에게 가장 큰 소망은 성주풀이를 온전하게 전승하는 것이다. 내가 이 성주풀이를 배울 때는 정말 힘들게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전승을 발 벗고 나서고 있는데도 배우려는 후학 찾기가 쉽지 않다. 내가 전승하려는 성주풀이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안동제비원성주굿이다. 이것은 나 같은 무당을 통해 전승하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있다. 지금 하는 성주굿은 골계로 빠진 주술무가 천지다. 그 골계라는 것도 엉성한 뼈에 붙어있는 허수아비 같은 것이다. 성주굿이란 다름 아닌 성주풀이를 하는 것이다.

성주굿을 하면서 신의 내력인 서사무가를 무당의 입을 통해 구연하지 못하는 성주굿은 성주굿이 아닌 것이다. 성주굿을 하면서 무당이 성주풀이를 통해 제의의 형식을 갖추는 것이 올바른 성주굿인데 이렇게 하는 무당이 드문 것은 그들이 온전하게 성주굿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안동에서 하는 성주굿은 하나같이 천왕거리나 다른 굿에 슬쩍 몇 마디 성주 이야기를 하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성주굿과 성주풀이가 무당에 따라 다르다고 해도 성주굿은 뼈와 살이 제대로 붙은 서사무가로 불러야 성주신을 안치할 수 있다. 성주신은 모시지 않으면 절대 좌정하지 않은 신이다. 그리고 모셨다고 해도 족보와 주소를 정성껏 제대로 부르지 않으면 절대 성주신은 좌정하지를 않는다.

둘째, 굿의 제의를 따로 떼어놓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승되어온 구전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소리로 전승하는 것이다. 안동제비원성주풀이는 원래 무당이 부르는 무가지만 일반인이 부르면 그냥 유행가가 될 수 있고 일할 때 부르면 노동요가 되는 구조를 갖고 있어 거부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대중화를 위해서 창작한 안동제비원성주풀이도 많이 불려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째든 많은 이들이 부르는 것이 전승의 시각에서는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안동제비원성주지신밟기는 다수의 풍물패를 통해 전승하려고 한다.

다행히 요즘 들어 내 오랜 뜻을 이해하고 따라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퍽이나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현재 ‘제비원 송옥순 소리패’와 ‘제비원 송옥순 풍물패’가 중심이 되어 이 일을 해 나가고 있는 데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동참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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