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직 장관앞에서 성주풀이 선보여'
언젠가는 국가지점문화재 지정 믿어
'전현직 장관앞에서 성주풀이 선보여'
언젠가는 국가지점문화재 지정 믿어
  •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 승인 2015.02.0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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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성주풀이에 얽힌 나의 인생' 별곡 (7)>
[읊은이:송옥순/글쓴이:최성달]

성주굿을 할 때, ‘성주의 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 이라는 성주풀이를 노래한다. 이렇듯 예로부터 안동 제비원은 민족신앙의 본향으로 일컬어져 왔다. 최근 사단법인 안동제비원성주풀이 보존회 송옥순 회장은 2012년 안동제비원성주풀이를 전국최초로 완창하는 공연을 성공시켰다. 성주신앙의 체계적인 보존과 계승은 물론이고 현대인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송옥순 여사. 전통문화 유산을 온몸으로 계승·체현하고 있는 인간 송옥순의 삶의 이력을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의 기획으로 최성달 작가가 구술 받고 정리해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11. 전·현직 장관 앞에서 성주굿을 선보이다

10여 전의 일이다. 성주풀이를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만들고자 하는 발걸음이 다소 주춤하고 있을 즈음 환경운동가로 이름이 높았던 외사촌 김성현 (사)한국생명문화원 이사장이 내게 어느 날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백날 안동에서 안간힘을 써봐야 공든 탑만 무너지니 장관을 한번 불러서 그 앞에서 성주굿을 선보이겠다고 했다.”

외사촌의 말인즉 중앙정부 쪽에서 전혀 안동제비원성주풀이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한번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외사촌의 그 말을 듣고 우려 반 걱정 반을 털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관이 일부러 안동까지 내려와 성주굿 하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아 외사촌이 허세 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하소. 장관이 뭐가 답답해서 굿판을 보러 안동에 온단 말이니껴.”

“어허, 내 말 믿고 좀 기다려 보소. 성주풀이 본향이 안동인데 이걸 문화재로 못 만든 데서야 어디 안동에 사람 있다고 할 수가 있겠어.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면 장관 행차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

외사촌 김 이사장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포부가 당당했지만 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알다시피 그때만 해도 무속은 미신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팽배한 데다 전 현직 장관 또한 젊은 시절부터 과학도로 자신의 입지를 만든 분들이라 더더욱 안동으로의 행차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사촌의 기개가 너무나 괄괄했기에 혹시 내려온다고 해도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연히 어리석은 사촌 여동생 문화재 만들려다 장관 입지만 손상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짧은 소견에 행여 굿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장관의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하게 실리는 날엔 그 분들이 낭패를 보지나 않을까 불안했다.

그런데 외사촌 김 이사장이 선문답처럼 그 말을 던지고 난 뒤 한 달하고 달포쯤 지났을 무렵 환상은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었다. 외사촌이 전화로 전 현직장관 2명이 오기로 확정이 났으니 성주굿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전하는 전화기 너머로 외사촌의 목소리는 신명으로 들떠있었다.

나는 외사촌의 그 말을 듣고 지략을 겸비한 불도저 같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김 이사장의 능력 앞에 연신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성주풀이를 이해해주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동생의 일로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준 데 대해 뜨거운 가족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날이후 김 이사장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 분을 오빠라고 부른다. 나이로는 동갑이지만 달로는 몇 달 앞서기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건성이 아니라 속 깊은 가족의 정으로 그 분을 오빠로 정중하게 모시고 있다.

장관이 온다는 소식을 나는 권은도 선생님께도 알렸다. 성주굿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정말이지 기뻐하셨다. 늘 모자라는 제자라고 여겼던 선생님이지만 그때만은 마음으로 고마워하셨다.

선생님은 필생의 숙원 앞에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마냥 숙연해 하셨다. 장관을 두 분이나 모셔놓고 성주굿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크나큰 영광이었다. 특히 우리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것은 장관 앞에서 성주굿을 하기만 하면 성주풀이가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는 줄 알았기에 그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안동제비원성주굿판은 2005년 9월 9일~10일 양일간 탈춤공원 주무대에서 펼쳐졌다. 두 분의 전 현직 장관은 첫날에 내왕하여 난생처음으로 성주풀이를 경험했다.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는 두 분 장관의 표정에서 나는 종교가 달라도 문화적 관점으로 얼마든지 성주풀이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분 장관께서는 우리나라에 이러한 훌륭한 문화가 있다는 것에 대해 경탄해마지 않으셨다. 나는 이 분들이 서울로 돌아가서 안동제비원성주풀이가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직 장관의 그분은 얼마 있지 않다가 그 자리를 그만두었다. 그 여파가 이어져 비록 지금까지도 안동제비원성주풀이가 문화재 반열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기간을 그리 길게 잡지를 않는다.

시장,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안동을 이끌고 가고 계시는 지도자들이 성주풀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는데다 이것을 제대로 전승하려는 사람들의 열의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해서 기필코 숙원을 이룰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12. 탈춤과 굿

모든 탈춤의 기원은 굿이다. 탈춤은 기원전승에서부터 신화성을 내포하고 있다. 탈은 인간이 만든 것이나 신의 의해 그 명령을 받든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발이 열리지만 이 축제의 연원 또한 굿에서 비롯되었다. 굿이 진화하여 탈춤이 되었고 탈춤이 전 세계 사람들을 덩실덩실 춤추게 만드는 축제가 된 것이다. 우리 안동에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하회별신굿과 수동별신굿이 존재하는 곳이다. 물론 어느 지역이나 별신굿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우리 지역 별신굿이 유명세를 탔던 것은 그만큼 난장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는데 그와 관련된 일화마저 전해져 오는 것이 하회별신굿이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났다.
“생전에 하회별신굿을 구경해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구 이놈이 헛살았구먼.”

저승 가서도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별신굿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처녀 때 할머니에게 들은 하회별신굿은 그야말로 듣기만 해도 장관이었다. 별신굿이 열린다는 소문이 나면 인근 마을은 물론 안동지역 사람들까지 구경을 가는 바람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하회별신굿의 제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탈춤이 민중의 억눌린 감정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사회적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음껏 양반계급과 승려라는 기존 질서를 해학과 재담으로 희롱하지만 그것은 해체가 아니라 결속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하회별신굿을 카타르시스적 민중의 반란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성제도에 대한 저항을 해학으로 담아내고 있기는 하나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기성세력의 용인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주체성으로 탈춤 속에 저항 의식을 내포하기는 했으나 여기에는 정화라는 고도의 정치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되고 힘든 민중의 삶에 탈춤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탈출구를 열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측면에서 양반과 승려가 지배계급으로 군림했던 고려시대의 경우 어느 정도 민중 봉기에 대한 해소책이 이것으로 마련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지배계급의 입장에선 정말 일어날 수 있는 폭동 같은 민중봉기를 미리 하층계급의 정신적 정화라는 해소책을 탈춤을 통해 제어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가설이 유력한 것은 실질적으로 탈춤의 경우 하층민들이 이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얻는 것으로 기존 질서를 받아들이며 사회적 결속을 성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탈춤 기간의 심리적 반란은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민중의 염원이었으나 현실의 기존제도는 변하지 않고 다만 정신적 정화로 이어가야 하는 삶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3. 동신제 서낭신앙을 통한 신성현체 체험

동신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 풍어를 기원하며 마을을 수호해 준다고 믿는 신을 향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데 당산제라고도 한다. 대개 마을 입구에 있는 신목 앞 제단(祭壇)에서 제를 지내지만 따로 사당(祠堂)을 지어 신을 봉안해 놓은 곳도 있다.

동신제를 지내기 전에 미리 당산목에 금줄을 치고 주위에 황토를 뿌려 성속의 분리를 알린다. 당주는 마을 원로 중에 화목하고 부정 타지 않은 사람 중에서 맡기도 하지만 무당이 관여하는 경우에는 대잡이를 통해 대나무가 떨려야 접신이 되어서 신탁이 전해졌다고 보고 그 사람을 당주로 선정했다. 당주로 선정되면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목욕재계 한 후 부인 곁에도 갈 수 없으며 출산, 초상, 혼사에도 출입을 금했다.

당주는 접신상태의 사람이다. 당주가 가진 접신경험이 마을사람들에게 전이되어 마침내 마을 전체가 접신경험을 갖게 되는 과정이 동신제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마을 사람 누구든 신의 강림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안도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동신제의 핵심인 것이다.

제의 후 서낭신이 흠향한 제수를 마을 사람들이 음복하는 것은 성성(聖性)의 공유라고 할 수 있고,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제비를 갹출하고 제의 뒤에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은 지연적 유대감과 단합을 돈독히 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제의가 끝난 뒤 금줄을 걷어냄으로써 성·속은 일상생활 속으로 용해된다.

예로부터 우리 안동은 서낭신앙이 강하게 뿌린 내린 곳이다. 각 마을마다 동신제를 지내기도 하지만 옛날 안동군 청사 자리에 당산나무는 지금도 매년 안동시의 평안을 갈구하며 시장이 동신제를 올리고 있다. 그 밖에 지금은 누군가 베어서 사라졌지만 안동댐 보조호수 가는 길 중간에 있던 회나무 또한 신목으로 무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숭배를 받았다.

우리민족의 거목 숭배인 서낭신앙의 기원은 태초부터 기원된 것인 만큼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단군시조의 아버지인 환웅이 나무를 타고 지상으로 하강하여 인간 세상을 제도할 때부터 나무는 이미 우리민족에게 신성한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동신제라는 공동제의는 세계수를 통해 맨 처음 이 땅에 삶의 터전을 일군 우리민족의 기원을 대를 이어 되살리고 축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아득한 시절의 환웅 천신과 그 아들 단군임금이 오늘의 서낭신으로 강림하여 재의를 통해 우리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특히 나 같은 무당에게 서낭굿이란 신이 태초에 했던 일을 춤추고 노래하면서 신의 말을 전하고 신의 몸짓을 옮기는 것이다. 관념만이 아니라 굿이라는 신명난 놀이를 통해 현실로써 구체화하는 것이 나 같은 무당의 역할이고 사람들은 그런 무당을 통해 神聖(신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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