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바꿀 것인가, 이민을 떠날 것인가?
확 바꿀 것인가, 이민을 떠날 것인가?
  • 김대호 소장
  • 승인 2009.06.0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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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대호의 정치통계와 해설(9)

한국은 숙명적으로 해외(시장, 식량, 에너지, 자원)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국가의 보호 장벽도 높게 치려야 칠 수가 없다. 또한 주된 수출품의 성격상 전통의 강호인 일본, 미국, 유럽 기업과 신흥 강호인 중국 기업 등과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물론 기술력이나 영업력이나 브랜드 파워 등으로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없기에 높고 안정적인 이윤율을 구가 할 수가 없다. 앞의 글(누가 시장주의를 보수적 가치라 하는가?)에서 한국 대기업의 기복이 심한 영업이익률 그래프를 선보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글로벌 경쟁으로부터 오는 격심한 변화, 부침의 압력에 대한 대응과 혁신이 사활적인 문제이다.

▲ 김대호 소장
일반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이나 혁신 능력은 사람과 돈(금융 조달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지식기반 시대에, 그것도 하이테크나 미들테크(middle tech)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기업의 사활의 관건은 아무래도 경영, 기술, 영업, 마케팅, 금융을 담당하는 핵심 인력들의 창의와 열정이다. 과거 자본(금융)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에는 자본(금융) 조달 능력이 기업의 명운을 갈랐지만 금융 자유화/세계화로 인해 금융시장이 발달한 환경에서는 이 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지위로 떨어졌다. 한국의 벤처 중소기업 관련 금융 조달 환경은 미국 보다야 못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선진국에 비해 특별히 열악하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이제는 한국 기업의 금융 조달 능력조차도 기업의 핵심 인재들의 경영, 기술, 영업, 마케팅, 네트워킹 능력에 크게 의존하는 세상이 되었다.

한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업과 협업이 발달 할수록, 또 수많은 경제 주체들의 상호 연관성이 증대 할수록 수많은 가치생산 사슬(클러스터)들의 공조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금융과 산업간, 대학과 기업 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원청과 하청 간, 구상 노동과 실행 노동 간의 공조가 중요하다.

기업의 명운을 쥐고 있는 인재들의 노력 및 능력과 각 경제 주체들 간의 공조 능력은 이들을 규율하는 평가보상(상벌)체계에 달려있다. 특히 한국은 혹독한 역사와 문화가 빚어낸, (전후방의 가치생산 사슬을 약탈하여 자신만의 단기적인 이익을 누리려는 넘치는 사회적 강자들의) ‘화전민 충동’ 제어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과거라면 산업 쪽으로 많이 왔을 청년 인재들이 공공부문이나 자격증 등 각종 장벽(규제)으로 보호되는 부문(‘사’자 직업과 대학 등)으로 엄청나게 빨려가고 있다. 경쟁국의 일류 급 청년 인재들은 여전히 국제경쟁이 치열한 산업 쪽으로 많이 가고 있으나 한국은 이곳으로 갈 유인이 너무나 미약하다. 아니 쉽게 돈과 명예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부문의 흡인력이 너무 강하다. 잠재력이 우수한 청년 인재들을 대거 빨아 간 곳에서는 기득권을 과보호하는 평가보상(상벌)체계로 인해 이들의 잠재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중, 고등학교(교사 사회)와 대학(교수 사회)이 대표적이다.

금융 산업 부문은 그 처우가 전반적으로 높고, 성과, 직무에 따른 처우가 확실하여(오히려 과도하여) 변함없이 많은 청년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선거법처럼 ‘상품 개발및 판매에 관한 한 법으로 허용된 것만 가능한’ 포지티브(positive) 규제로 인하여, 또 예대마진, 부동산 담보대출, 단순 금융 중계기능(현금 인출기 수수료) 등으로 너무 쉽게 돈을 버는 구조로 인하여 이곳에 집중된 인력의 질적 수준에 비하면 국제 경쟁력은 신통찮은 편이다.

(금융규제가 너무 강하고 원시적이다 보니 다행히 한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피했으니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북한과 방글라데시처럼 자동차 자체가 없어서 교통사고가 없는 꼴이니!)

한편 이공계 일류 급 청년 인재들이 엄청나게 집중된 의료 산업 부문은 ‘의사들과 민간 보험사들의 약탈’에 대한 지나친 우려로 인해, 산업발전의 동력인 평가보상(상벌) 체계를 국가독점인 국민건강보험이 틀어쥐므로 서 의료서비스의 산업화와 국제 경쟁력 강화가 매우 지체되고 있다.(이는 워낙 복잡한 문제라서 다른 글에서 다뤘다) 인문계 일류 급 청년 인재들이 집중된 법률 서비스 산업은 각종 진입 장벽, 경쟁 제한 장벽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국제 경쟁력 확보가 요원하다. 이렇듯 일류 급 청년 인재들의 국제 비경쟁 부문 혹은 국가의 규제가 사활을 가르는 부문으로 쏠리는 현상은 1960~80년대와 확연히 달라진 현상이자, 한국 특유의 심각한 사회 병리 현상이다.

한편 생산과 단순 사무 관리를 담당하는 인력의 경우, 한국 대기업 종사자는 그 생산력(1인당 평균 국민 소득=PPP)대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처우를 누린다. 게다가 이 처우는 개인의 성과, 직무와 무관하다. 중소기업 등 다른 부문과의 근로조건 격차도 너무나 커고, 사회안전망도, 특히 대기업, 공기업 조직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코끼리 비스킷’ 수준이어서 유사시 고용 조정도 지극히 어렵다. 노조가 강력한 경우는 사내 노는 라인에서 바쁜 라인으로의 전환배치조차도 어렵다.

이 외에도 노동의 바닥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보면 경악 할 만 한 일이 너무나 많다. 이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서 약간 드러났듯이 대다수 재벌, 대기업 상층부의 경영 행태도 마찬가지다. 정말 한국은 알면 다치는, 그래서 알아도 말 못하는 불편한 진실이 너무나 많은 나라이다. 교육 부문에도 조세재정부문에도 공공부문에도 보건의료 복지 부문에도 언론사에도 종교집단에도...... 그 내부자들은 다 아는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진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정보지’(찌라시) 장사가 되고, 다른 한편 강자들이 보여주고 싶은 사실만 받아보는 강단파들의 끊임없이 세상 물정 모르는 헛소리 행진이 계속되는 지도 모른다.

게다가 한국의 (자칭)진보 정치 세력과 지식인 사회는, 의식하는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엄청난 기득권자가 된 대기업, 공기업 노조와 공공부문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 임금 고용 유연화, 공공부문의 효율성 제고, 공급자간 경쟁강화=소비자 선택권 강화 등 각종 합리화 조치를 신자유주의로 몰아붙이고, 여기에 반대하는 것이 진보의 기준처럼 되어 버린 것은, 이들의 이해관계와 다방면에 걸친 영향력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진보 동네에서 대기업, 공기업 노조의 위상과 영향력은 대단하다. 단적으로 노동부의 노동행정 대상이 되는 사업체(기업체가 아니다)의 규모별 근로조건과 노조가입률 등을 보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2007년 현재 한국에서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300인 이상 사업체 종업원의 시간당 정액급여는 15,415원으로 5인 미만 사업체(6,837원)의 2.25배, 5~29인 사업체(9,737원)의 1.58배이다. 300인 이상 사업체 종업원은 상여금과 퇴직금 있는 사람이 90% 내외지만, 5인 미만 사업체는 상여금이 있는 사람이 28.1%, 퇴직금이 있는 사람이 35%에 불과하다. 5~29인 사업체는 상여금이 있는 사람이 55.6%, 퇴직금이 있는 사람이 80.5%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기업 지사, 분소와 중앙의 본사를 한 덩어리로 인식하는 기업체를 기준으로 하면 기업 규모별 근로조건 격차는 더 날 것이다.

<표1> 규모별 근로조건 및 노조가입률 현황 (2007년)

한편 사업체 규모별 종사자 수를 보면 총 종사자 수는 1,187만 명으로, 이중 300인 이상 사업체 종사자는 162만 명, 5~29인 사업체 종사자는 428만 명, 5인 미만 사업체 종사자는 239만 명이다.(공무원들이 자주 비교 대상으로 삼는 100인 이상 사업체 종사자는 300만 명이다.)

1,187만 명은 노동행정 대상이 되는 존재들로, <전국 사업체 노동실태 조사>에서 일용직이든, 임시직이든, 상용직이든 사업체 내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로, 비교적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 중에서 빠진 사람은 직업 분류 상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 부문으로 분류되는 56만 명 등 60만 명 정도이다. 그런데 가구 조사를 통해 집계한 임금근로자는 1,597만 명인데 이 차는 대략 350만 명. 이들 350만 명은 가내 하청 종사자 등으로 아무래도 5인 미만(종업원 1~4인)사업체 종사자 보다 더 열악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 2006년 8월 실시한, 취업자 2,284만 명에 대한 월평균 소득 조사에서 100만원 미만이 33.9%, 100~200만원이 37.1%, 200~300만원이 18.1%로 저임금 층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노조 가입률을 보면 (300인 미만) 중소기업은 8.8%이며, (300인 이상) 대기업은 33.5%이다. 조합원 수가 300인 미만인 조합의 조합원 수는 총 34만8천명이지만, 300인 이상 조합의 조합원 수는 115만8천명이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조합원수가 5,000명 이상인 조합의 조합원 총수가 65만 명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1000~4,999명 규모는 29만2천명, 500~999인 규모는 12만5천명, 300~499인 규모는 9만1천명이다. 5,000인 이상 대형 노조에는 산업별 노조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어쨌든 한국 노조운동에서 차지하는 대형 노조의 위상을 알 수 있다.

<표2> 조합규모별 조합원 총수


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규모별 노조 조직률(2007년 현재)을 다음과 같이 집계하였다. 1~29인 0.7%, 30~99인 8.7%, 100~299인 15.3%, 300~999인 20.7%, 1000인 이상 34.2%이다.

한국 중소기업의 열악한 상황과 한국 조직노동 주력부대의 높고 경직된 처우와 비합리적 행태를 고려하면, 한국 중소자본이 노조를 호의적으로 생각할 리 만무하다. 오히려 실제보다 훨씬 위험스럽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노조의 조직형태가 ‘산별’이 된다 할지라도 -근로조건이 너무 차이가 나서 공동의 이해관계도 별로 없겠지만- 중소자본이 기업 사활의 문제로 생각하고 노조를 결사적으로 막으려하는 한 중소기업의 조직률이 높아지기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임금노동자의 70~80%를 조직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는 노동의 질이 비슷하면, 그 소속(대기업, 중소기업, 조직, 미조직, 공공부문, 민간부문, 흑자기업, 적자기업 등)에 따라 노동의 처우가 별 차이가 없다. 만약 북유럽이 한국 수준의 1인당 소득(PPP 기준 2만4천불)이었다면 15년 이상 근속한 현대 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와 2차, 3차 협력업체 노동자는 비슷하게 연봉 2천5백에서 3천만 원 정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교사와 공무원도 이 수준일 것이고, 금융 공기업 노동자들도 이들 보다 월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속에 따라 고용 유연성 수준도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노동시간은 짧고, 고용량은 훨씬 많았을 것이고, 특히 공공부문 종사자는 한국 보다 몇 배는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부문이 한국처럼 절대 선망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북유럽 사민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들 일 수 있을까? 혹시 사민주의에서 고용안정, 높은 고용율, 큰 공공부문, 튼실한 사회안전망, 노조의 높은 사회적 지위와 (공동 결정제를 통한) 큰 권능, 높은 세금만 보는 것이 아닐까? 높은 사회적 연대성이 한국 기득권자의 엄청난 양보 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는 한, 북유럽 국가 노조는 노조원이라 해도 그 처우가 유별나지도 않고, 행태 역시 경영 효율성 제고에 그리 적대적이지 않다. 요컨대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존재이다. 노사 협력을 선도하고, 노무 관리까지 어느 정도 맡는 어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파업을 일체 안하는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할 때는 한다.) 하지만 한국의 노조는 ‘단결하면 힘 생기고 투쟁하면 쟁취한다’는 신념으로 뭉친,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전투적으로 추구하는 강력한 이익집단이다. 노동의 바닥 정서는 여전히 노사 협력에 대해 입을 벙긋하면 대체로 어용으로 몰린다. 그런 점에서 노조는 우리나라 경제단체, 주요 정당, 직능협회, 기업, 시장 지배적 언론사들, 대학 등 대부분의 경제주체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다.

문제는 한국 진보 지식사회는 유독 노조와 공공부문에게만은 ‘공공성의 수호자’라는 가면을 씌워준다는 것이다. 이는 엄청난 연구 용역비로 수많은 교수, 대학, 연구소를 쥐고 흔드는 한국 최고, 최강의 ‘갑’적 존재인 관료들과 여기에는 못 미칠지라도 가난한 동네(진보 지식사회)를 흔들기에는 충분한 적지 않은 용역비, 자문료, 구독자(수틀리면 불매운동도 한다)를 지렛대로 사용하는 대기업, 공기업 노조라는 ‘갑’적 존재의 합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재벌, 대기업 연구소들은 원래 기업의 이해와 요구에 복무하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기에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나 가식은 없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 기업들은 세계화와 지식정보화와 중국의 약진 등으로 인해 변화, 부침, 불확실성이 대폭적으로 늘어난 환경에 놓인 이상, 대기업은 고용임금 유연성이 거의 없는 ‘생산직 노동’을 늘리는 것을 한사코 꺼릴 수밖에 없다. 이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등 노동조합운동의 철의 기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40대 중반으로 올라가고, 대기업 고용이 꾸준히 줄어든 이유이다. 한편 노동의 처우가 노동에 대한 시장수요나 노동의 창의, 열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리=소속(자격증 유무, 대기업, 공기업, 공공부문, 금융업 등)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1류 급 청년 인재들이 중소기업으로 갈 이유는 더 더욱 줄어든다.

노동의 처우가 노동의 양, 질이 아닌 ‘소속(자리)’에 따라 결정되는 한, ‘지대(자릿세)’가 별로 없는 (민간) 중소기업의 인재 기근 현상은 해소 될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익성 격차나 기업/사업체 규모에 따른 큰 임금 격차는 대기업 자본과 노동이 공모하여 행한 중소기업에 대한 ‘사실상의 약탈’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기술, 시장, 수익을 직접적으로 약탈하고, 간접적으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는 합리적인 상벌체계를 파괴하여 중소기업으로부터 산업 인재들을 약탈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적 강자와 노블레스들의 불건전한 물적 기반(과도한 자릿세=너무 비껴가는 시장원리), 사회 전반의 상벌체계의 왜곡, 중소기업의 구조적 인재 기근, 중소기업에 대한 사실상의 약탈 등은 그 어떤 나라보다 한국이 심하게 앓는 병리 현상이다. 한국 사회나 산업의 광우병이 있다면 비정규직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한창 잘 나가는 조선, 자동차, 철강,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LCD 산업 등이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많은 무역흑자와 고용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산업이나 제품이 이 자리를 대체해 주어야 한다. 한국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프랑스처럼 100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외화와 고용을 창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관광 자원도 없고, 스웨덴, 핀란드처럼 자연 자원도 없기에, 새로운 ‘CASH COW' 역할을 할 산업과 제품을 필사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동안은 한국은 이 대체 작업을 대체로 잘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위기 상황을 알리는 비상벨이 급박하게 울리고 있다.

위기의 핵심은 한국의 재벌, 대기업, 토건족, 사학재단, 직능협회, 관료, 노조 등 보수.진보를 대표하는 거대한 이익집단과 이들에 휘둘리기도 하고 결탁하기도 하는, 무능하고 사악한 정치, 언론, 지식사회가 합작한 후진적 상벌체계다. 다시말해 한국의 대부분의 사회적 강자와 노블레스로 하여금 너무 쉽게 돈과 명예와 권력을 누리게 하는 각종 반시장적, 반민주적 장벽이다.

이 장벽은 무조건 해체가 능사가 아니다. 해체할 것도 있고, 적정 수준으로 조정할 것도 있고, 유지할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는 특허권과 비슷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허권을 과보호하면(특히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처벌이 과도하면), 기득권자들은 좋지만 후발 혁신을 봉쇄해 버린다. 기득권자는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함포고복(含哺鼓腹) 하면서 나태해지고, 비기득권자들은 (지금 서울 소재 대학 전임교수 따내기처럼, 공기업 입사처럼) 점점 올라가는 엄청난 통과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한국의 엄청난 사교육 열풍, 공시, 고시, 유학 열풍, 청년 인재들의 비국제경쟁 부문으로의 쏠림, 세계 최고속의 저 출산 고령화 등 대부분의 사회 병리 현상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다.

반대로 특허권 보호 장치가 너무 약하면 사람들은 혁신(특허 제출) 자체를 꺼리게 된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그 보호 수준을 조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 사회적 강자와 노블레스들에 대한 특권, 특혜가 너무 지나쳐서, 준 계급사회로 되고 있다. 비기득권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너무 과도하여 양극화가 일어나고, 사회의 역동성이 급속히 떨어지고, 미래의 성장 잠재력이 고갈되고 있다. 생산력 수준에 비해 너무 많은 불만과 증오가 흐르는 나라가 되었다.

단적으로 부모가 월 100~200만 원 이상 과외비를 지출할 수 있는 집안의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에서, 미국 유학비용을 댈 수 집안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에서 불공정과 불공평 시비가 만발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철밥통, 은밥통, 금밥통을 가진 사람들도 자기들 판단에 노동의 양, 질이 별 것 아니면서 더 많이 받고, 더 편하게 사는 노동자들이 있으면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모두가 적게 기여, 부담하고 많은 권리, 이익, 혜택을 누리는 도적떼 심리에 사로잡히게 된다. 도적떼 공화국은 불만 공화국이다. 불교, 기독교, 개똥철학은 쉼 없이 지나친 탐욕을 버리라고 하지만 명명백백한 불공정과 불공평 앞에서는, 이를 박박 갈거나 자포자기할 사람은 많아도 초연 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한국 기득권이 누리는 지나친 특권과 특혜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지만, 한국이 망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대역사다. 이는 대통령이나 의원 몇몇이 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강력하면서도 유능한 정당과 정치 세력이 수 십 년간에 걸쳐서 사방에서 날아오는 태클을 뚫고 밀어부쳐야 할 대역사다. 암만 생각해 봐도 강력하고 유능한 정치와 정당이 서지 않으면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지금 수준의 번영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사회와 역사에 대한 부채감도 없고, 정치적 무력감에 사로잡힌 일개 월급장이 라면, 그러면서도 한국 사회의 미증유의 위기를 예고하는 X선, CT, MRI 사진을 눈이 아프도록 많이 보았다면, 아마도 자식 세대의 기회와 미래를 위해서는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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